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Smart Lee 2008. 10. 11. 22:57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①

 

몇 해전 EBS에서 방영된 김용옥 박사의 노자 특강이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아마 21세기가 갓 접어든 때였던 것 같다. 그때 그 강의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던 것은 강의한 분의 능력도 큰 몫을 하였겠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는 즈음에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었던 기대감과 불안감 탓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강의에서 김용옥 박사는 노자사상이 21세기에 인류가 나갈 한 대안(代案, Alternative)이라 하였던 기억이 난다
 
노자사상을 한마디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윤곽을 말하자면 무위사상(無爲思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문명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위(人爲) 혹은 유위(有爲)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위는 무엇이고 무위는 무엇인가? 한자에서 爲란 글자는 “만든다,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人爲 혹은 有爲의 세계는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가공적인 세계이고 無爲의 세계는 인위적인 가공이 없는 자연적이고도 인간 본래적인 모습의 세계이다. 노자는 인위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위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가르쳤다. 물론 서양에도 이런 노자의 사상과 비슷한 사상을 펼친 사람들도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룻소, 19세기 미국의 소로우, 20세기 미국의 스캇 니어링 같은 분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 분들이다. 이런 무위의 세계로의 복귀를 심리학에서는 불안과 갈등, 소외와 고독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의식(無意識) 속에 품고 있는 어머니 자궁 속으로의 회귀의식(回歸意識)과 연관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②

 

 

지금의 세계는 양극이 공존한다. 한 쪽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논하면서 무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다른 한 쪽에서는 첨단 과학, 첨단 기술을 내세우면서 인위, 유위의 세계로 계속 나갈 것을 말한다. 한 쪽은 자연 속에서 신선처럼 사는 길을 찾고 다른 한 족은 첨단 지식을 앞 세워 기계와 같은 인간을 보여준다. 한 쪽은 과거로 돌아가야 에덴이 있다 하고 다른 한 편은 앞으로 나아가야 에덴이 있노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인공(人功)을 극대화 할 것이냐? 無爲의 길을 택할 것이냐? 人爲의 길을 택할 것이냐? 그도 아니면 두 쪽을 절충한 모습에서 머무를 것이냐? 無爲와 人爲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차원은 없을까?

러시아의 솔제니친이 한 말이 생각난다. 현대의 병은 “영적 차원을 상실한데서 일어난 병이다”는 말이다. 이 말에 공감을 표하면서 현대의 병을 치료하자면 길은 하나다 인류가 잃고 있는 영적 차원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 단어가 있다. 神爲란 단어이다. 신위란 단어는 하나님을 뜻하는 신(神)자와 “일한다, 성취한다”는 뜻인 위(爲)자가 합하여진 단어이다.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에서 신위의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 같은 구절이 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예레미야 33장 2절)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성취하시는 바로 신위(神爲)이다. 현대인들이 無爲를 잊고 人爲를 찾으면서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 神爲이다. 이 신위의 회복이 인류 공통의 과제이다.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③

 

 

현대인들이 무위(無爲)를 찾으며 잊고 있는 것과 인위(人爲)를 찾으며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신위(神爲)이다. 신위를 회복하는 것이 인류의 대안(代案)이요 희망이다. 그렇다면 신위의 차원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무엇일까? 바로 기도이다. 예레미야서 33장에서 다음같이 일러준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장2, 3절)

바로 기도하는 길이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에게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고, 알지 못하고 상상치도 못하였던 큰일과 비밀스러운 일을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요 무기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응답을 받게 되고 세상을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늘과 땅이 만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신위(神爲)의 역사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삶의 현장(現場)에 하늘의 뜻이 성취하여지게 된다. 그런 기도의 중심에 주기도문(主祈禱文)이 있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모범 기도문이다.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④

 

 

지상에 신위(神爲)를 이루는 길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이루어 나가는 통로가 된다. 그 기도의 중심에 주기도문(主祈禱文)이 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교회를 왠만큼 다닌 사람들에게는 주기도는 생활화되고 습관화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주기도문이 습관화 되었기에 그 깊은 내용을 성찰함이 없이 그냥 주문을 외우듯 되풀이 하게 된다.

그래서 말틴 루터가 말히기를 “주기도문은 순교(殉敎)를 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주기도문을 입으로만 그냥 되풀이 할 뿐 그 내용을 성찰하거나 삶에 실천에로 이어짐이 없이 한 점을 지적하여 한 말이다. 주기도문의 중요성은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가 없다. 어느 분이 이르기를 기독교에는 3가지 보배가 있는데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셋이라 하였다. 사도신경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신앙고백의 내용이고 십계명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윤리의 내용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합한 내용이라 하겠다. 주기도문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로 시작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이어진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로 마무리 짓는다. 왕이신 하나님이다.

아버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왕이신 하나님으로 끝나는 주기도문은 양손에 비유하여 이해할 수 있다. 

   

                         무위(無爲), 인위(人爲), 신위(神爲) ⑤

 

 

신약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다음같이 이르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라”(마태복음 6장 22, 23절)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내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외부 환경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이 바꾸어져야 함을 뜻한다.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을 먼저 바꾸어야 함을 뜻한다. 오늘의 시대는 인위(人爲)가 극도로 뻗어나간 시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사를 땅의 관점, 인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땅의 관점으로만 보는 세계 속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 그런 눈으로는 하늘의 차원, 신위(神爲)의 차원을 볼 수 없다.

주기도문은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여 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이들 6가지 사항들은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함한다. 이들 항목들은 기도자가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이 때 새롭게 본다는 것은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본다는 뜻이다.

신위의 차원에서 삶을 보게 되면 모든 삶의 영역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관점이 달라지게 되면 살아야할 이유도, 삶에의 의미도 달라진다. 주기도문은 먼저 기도자의 관점을 치료함으로써 그의 삶을 새롭게 한다.

 

(08-10-10~15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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