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인구가 1억 한족 정복해 280년간 중국을 지배한 민족
[중국의 소수민족] 만주족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9년. 중국 대륙의 주인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滿洲族)이었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앞머리를 ‘빡빡’ 밀고 변발을 늘어뜨린 만주족 황제였다. 각 지방의 성(省)은 대개 한족 관료들이 다스렸지만 군사권은 만주족 수중에 있었다. 만주족 장군들은 한족의 소요사태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한족 공산당 간부가 군사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소수민족 엘리트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현재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2년 뒤인 1911년에야 한족은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부르짖으며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한족은 중국 대륙을 다시 탈환했고 만주족 황제를 베이징의 자금성에 감금했다. 만주족을 쫓아낸 한족은 만주족의 이름을 ‘만주(滿族·만족)’로 바꿔버렸다.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한때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인구 1068만명의 만주족은 성(省)급 자치구도 하나 없는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 ▲ 만주족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개량한 옷을 입은 베이징 올림픽 도우미들.
- photo 조선일보 DB
청(淸)의 건국
읍루·물길·숙신·말갈·여진 등 다양하게 불려
1636년 청 세우면서 ‘만주족’으로 명칭 통일
만주족은 본래 △읍루 △물길 △숙신 △말갈 △여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636년 청나라를 건국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불리던 명칭을 ‘만주족’으로 통일했다. ‘만주’라는 이름은 ‘문수사리’를 일컫는 산스크리스트어(범어) ‘만주슈리’에서 나온 말로 알려졌다. 불교 용어 ‘만주슈리’는 ‘대단히 좋은 행운’을 뜻한다.
만주족과 한족은 외관상 큰 차이가 없다. 광범위한 혼혈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좁은 미간과 곧은 콧날, 밝은 피부색, 사각형의 얼굴은 전형적인 만주족의 생김새로 여겨진다. 혈액형 가운데 B형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한 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성(姓)을 보면 만주족과 한족을 대개 구분할 수 있다. 만주족 가운데는 △퉁( ·동) △관(關·관) △마(馬·마) △쑤어(索·제) △치(齊·제) △푸(富·부) △나(那·나) △랑(郞·랑) 8개 성씨가 비교적 많다. 이들 8개 성은 한족 가운데는 드문 성씨로 2자 이상의 만주족 복성(複姓)을 단성(單姓)화한 것이다. 예컨대 ‘루바얜(如巴顔)’이란 만주식 성은 비슷한 의미의 ‘푸(富·부)’씨로, 만주족 황실(皇室)의 성인 ‘아이신줴뤄(愛新覺羅)’는 ‘진(金·김)’씨로 바꾼 것이다.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에서 종종 만주족 황족의 후예로 오인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는 900여개가 넘는 한족들 성씨 가운데 희귀한 성이다.
한때 중국 전역을 지배했던 민족이라 교육수준은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높다는 평가다. 지난 1990년에 실시한 한 조사에서 만주족 1만명당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1652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국 전체 평균(139명)보다 거의 10배 이상 높은 숫자다. 심지어 한족(143명)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문맹 및 반(半)문맹 실태조사’에서도 만주족 가운데 1.41%가량만 문맹 혹은 반문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전체 평균 22%보다 거의 2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으로 역시 한족(21%)보다도 낮다.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만주족은 예술 쪽에 두각을 나타냈다. 문화대혁명 때 투신자살한 중국의 인민소설가 라오서(老舍)를 비롯해 홍콩 영화 ‘황비홍’ ‘동방불패’ 등에 출연하며 청순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관즈린(關之琳·관지림), 현재 중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남자 배우 중 하나인 후쥔(胡軍)도 만주족 출신이다. 또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7)도 랴오닝성 선양에서 태어난 만주족이다. 지난 1995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영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랑랑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수입만 9100만위안(약 180억원)에 이르렀다.
- ▲ (좌)만주족 황실의상 photo 바이두 (우)만주족 민간의상
동북 3성의 만주족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 10% 거주
선양엔 황궁과 황제들 무덤 보존돼 있어
이들 만주족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동북 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일대다. 만주는 동북 3성을 통칭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중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닝성에는 만주족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100만명가량이 살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와 환런(桓仁) 등에는 만주족이 모여 사는 만주족 자치현(縣)이 6개나 설치돼 있다.
1644년 만주족이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해 중국을 정복했을 때 처음 수도로 삼으려고 했던 곳도 베이징이 아닌 랴오닝성 선양이다. 당시 만주족 강경파들은 “베이징에 있는 한족을 몰살시키고 선양에 수도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주족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선양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남하했다. 때문에 지금도 동북 3성 최대 도시인 선양에는 만주족 황제들의 무덤은 물론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까지 살았던 만주족 황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선양의 만주 황궁은 베이징에 있는 고궁(자금성)과 함께 중국의 2대 황궁으로 꼽힌다. 오히려 보존상태는 고궁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도 나온다.
베이징으로 내려간 뒤 만주족은 자신의 고향인 동북 3성 일대를 성역화했다. 특히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경계에는 975㎞에 달하는 버드나무 경계를 세우고 한족과 몽골족이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유조변’으로 불리는 버드나무 경계는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쌓아 이민족과 자신을 분리한 것처럼 만주족 역시 버드나무를 세워 이민족과 경계를 삼은 것이다. 대륙에서 한족에게 쫓겨날 경우를 대비해 돌아갈 땅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이 대거 거주한 선양은 ‘버드나무 도시’란 뜻에서 ‘무크덴’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주족이 남하해 텅 빈 땅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간 조선족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만주와 한반도의 경계에 있는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것은 조선족과 만주족의 공통점이다. 조선족과 만주족은 동북 3성 일대에 함께 섞여 살고 있다. 이들 두 민족은 외형상으론 구분하기 힘들지만 개고기 식용 여부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개고기를 즐겨먹는 조선족과 달리 만주족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심지어 만주벌판의 겨울철 삭풍에도 불구하고 개털로 만든 모피는 절대 입지 않는다. 만주족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누르하치가 한족에게 쫓기던 중 누렁이(黃狗)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야기가 만주족 사이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 ▲ 청나라 만주족 황제 강희제를 연기하는 한족 배우 천다오밍.
문화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는 만주족이 입던 옷
만주 황실요리인 ‘만한전석’도 최고 요리로
중국 전문가들은 “오늘날 중국인들은 만주족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중국 영토의 윤곽을 만든 것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기 전 한족들의 영토는 대략 지금의 2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최근 국제 문제로 부상한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은 모두 만주족이 정복하고 확장한 지역이다. 심지어 만주족은 지금은 독립국으로 남아있는 몽골(외몽골)까지 영토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쫓겨나자 이들 지역도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오늘날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대부분의 소수민족 자치구는 재점령했지만 외몽골은 아직도 수복하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일부 한족들은 “외몽골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서 가장 많이 방영하는 역사 드라마도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이야깃거리라서 자료가 풍부하고 고증이 쉽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도 베이징 곳곳에는 만주족 황족과 귀족들이 살던 저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명의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강희왕조(2001년) △옹정왕조(1997년) △건륭왕조(2002년)와 같은 CCTV 대하드라마로 제작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족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만주족 황제가 변방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소수민족을 정벌하는 장면에 열광한다. 물론 TV 드라마에서 만주족 황제 역을 맡는 배우들은 대개 한족 배우다. 또 드라마 속의 만주족 황제는 만주 전통복장에 변발을 하고 있지만 만주어가 아닌 한어를 구사한다. 만주족은 한어와 다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만주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중국 학계의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만주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도 케이블과 위성TV 등을 통해 방영된 바 있다.
- (좌)만주족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 영화 (우‘적벽대전’에 출연한 만주후쥔)
유산
신장·시짱·네이멍구 등 정복, 영토 확장
현재 국경도 한족 아닌 만주족이 만든 것
만주족의 영향은 이뿐만 아니다. 중국에서 귀빈을 대접할 때 내놓는 청나라 황실요리 ‘만한전석(滿漢全席)’도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로 구성돼 있다. ‘차이니즈 드레스’로 불리는 ‘치파오(旗袍)’도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복장이다. 만주 ‘기인(旗人·만주족 군사·행정 편제에 속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란 의미의 ‘치파오’는 본래 남녀 구분이 없었으나 현재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 의미가 줄어들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겨드랑이 사이를 끈 단추로 여미는 치파오는 옷깃은 높고 소매가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치마 옆이 길게 트이고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의 형태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관능적인 옷이란 말도 듣는다. 1972년 미·중 수교 때 방중(訪中)한 미국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패트(pat) 여사가 치파오를 입은 중국 여성을 보고 “중국의 인구가 왜 세계 제일인 줄 알았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있다.
당초 한족들은 치파오를 오랑캐의 옷이란 뜻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렀다. 청나라 사람들의 옷이란 의미에서 ‘칭좡(淸裝)’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족의 문화로 완전히 흡수해 한족의 전통복장으로 변화시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메달 시상 도우미가 입었던 옷도 개량 치파오다. 결혼식 때 중국 신부들이 하얀 웨딩드레스와 함께 입는 옷도 대개 붉은색 치파오다. 한때 여대생들 사이에 ‘치파오’를 입고 졸업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상하이탕(上海灘)과 같은 홍콩 브랜드는 1930년대 상하이풍 치파오 디자인 콘셉트로 의류와 패션 소품을 출시해 세계적인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에는 만주족의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의 옷인 ‘탕좡(唐裝)’이 상대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 당나라 옷이란 뜻의 ‘탕좡’은 치파오와 달리 넓은 소매와 펑퍼짐한 치마가 특징이다. 농경 정착민족인 한족은 소매 폭이 넓고 펑퍼짐한 옷을 선호했다. 지난 2001년 상하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입었던 중국 전통의상도 ‘탕좡’이다. 한족 민족주의로 무장한 장이머우(張藝謀) 같은 5세대 영화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치파오 대신 한족 전통 의상인 ‘탕좡’을 선호한다. 장이머우가 총감독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도 ‘치파오’가 아닌 ‘탕좡’을 입은 배우들이 개막식 공연에 대거 출연했다.
독립의 꿈
‘마지막 황제’ 푸이 내세워 만주국 건립
독립 부추긴 일제의 패망과 함께 물거품
지금은 사실상 한족과 동화됐지만 한때 만주족도 독립을 꿈꿨다. 과거 일제는 만주족이 처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의 독립을 부추기기도 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줴뤄 푸이(선통제)를 내세워 동북 3성과 네이멍구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국을 세운 것이다. 푸이도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지금의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수도로 하는 만주국의 황제(강덕제)로 등극했다. 당시 창춘은 베이징(北京)을 대신하는 ‘새로운 수도’라는 뜻으로 신징(新京)으로 불렀다. 백두산을 끼고 있는 지린성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현재도 창춘에는 만주국 초대 황제 푸이가 살았던 황궁과 정부청사에 해당하는 국무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마지막 만주족 황제 푸이는 정치범으로 붙잡혔다. 이후 약 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다 한족 마오쩌둥의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했다. 1967년에 암으로 사망한 푸이는 28년이 지난 1995년에야 비로소 만주족 황릉에 안장됐다. 푸이의 일대기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푸이가 살던 창춘의 황궁은 ‘외세에 의한 민족분열’을 경고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날 만주족이 독립하거나 다시 한족을 정복하는 것은 꿈 같은 얘기”라고 단언한다. 100여년 전 중국 전역을 지배하면서 전국 31개 성(省)과 자치구로 만주족이 흩어져 버린 것도 독립의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국 대륙 각지에 퍼져있는 만주족들은 과거 만주족 팔기군(만주족의 주력군단)의 후예들이다. 만주족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동북 3성을 비롯한 허베이(河北)성과 네이멍구 자치구 등이 수도 베이징과 너무 가깝다는 점도 독립 움직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반면 가장 활발한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신장 위구르자치구나 시짱 티베트자치구는 베이징과 수천㎞ 이상 떨어져 있다.
2009.09.13 주간조선 이동훈 기자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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