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팽창주의 문제

일본 '심장보다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라'

Smart Lee 2011. 1. 8. 23:57

     일본 '심장보다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라'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②-제1차 일제의 은신처, 류큐> 
           400년동안 일본은 류큐 해역서 5번의 대전환…그 첫번째가 도요토미
 

 

                                                                                                                 강효백 경희대 교수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류큐와 미국 대통령들
9. 독도와 다케시마, 센카쿠와 댜오위다오
10. 동북공정과 류큐
11. G2시대 중국, 해양대국화로 몰입하다
12. 중국 차세대 팽창목표는 류큐와 동해?


과거 400여년 동안 시간의 바다에서 '불침항공모함' 일본호(日本號)는 크게 잡아 다섯 번 쯤 키를 돌렸다. 그 다섯 번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공간의 바다는 모두 류큐 해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호는 류큐 해역에서 내부적 통일에서 외부적 도발로 방향을 돌리다가(1591년), 다시 팽창주의에서 쇄국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룩했다(1609).

그러다가 류큐해역 근처의 사스마번(薩摩 蕃·현재의 가고시마 鹿兒島)이 주도하는 메이지 유신(1868)으로 내부적 단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류큐에서 키의 방향을 제국주의적 도발로 대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70년간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일본제국호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로 역사의 내리막길로 떨어지게 된다. 류큐해역에서 좌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패전 후 27년간 일본은 확산욕구의 본능적 충동을 경제 분야로 집약시켜오다가 다시 류큐에서 또 다시 정치외교군사대국의 지향으로 방향을 바꾸어(1972년 오키나와 반환, 중국과의 수교 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1587년 규슈(九州)를 평정하여 전 일본을 통일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확대지향적 인물이었다. 지방 영주들의 불만과 잔존하는 강력한 그들의 군사력을 중국대륙과 한반도 정벌을 내걸어 욕구불만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과대망상적 야심을 통일 일본의 막강한 역량에다 전환시켜 폭발시키고 싶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쳐 중국과 인도대륙까지를 정복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1592년, 그는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비켜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에 대한 두차례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중에 병사하였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 전인 1591년 8월 사스마번의 시마즈(島津)에게 조선침략을 위한 1만 5천명의 군역부담을 명하자, 10월 시마즈는 류큐왕국에게 병정 징집을 대신하여 7,500명의 10개월분 군량미 11,250석과 황금 8천냥을 상녕(尙寧)왕에게 요구했다. 류큐왕은 이를 거부하고 삼사관(총리격)인 정형(鄭逈)으로 하여금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계획을 명나라 조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사쓰마는 류큐사신을 억류하고 왜의 사신을 류큐로 보내 군사 7,000명의 10개월 양식을 조선에 상륙한 왜군에게 보낼 것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했으며, 이에 류큐군도 북부 5개 섬을 사쓰마에 양도하라고 강박했으나 이 역시 류큐는 거부했다.

같은해 , 도요토미는 에조의 땅 홋카이도(北海島)의 마쓰시마를 복속시켰다. 현재 남한의 전체면적에서 충청북도를 뺀 면적만한 홋가이도가 그때부터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열도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홋카이도의 복속은 도요토미의 팽창주의 영토욕에 따른 유일한 성공이자 빛나는 제국주의적 업적이었던 것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막부(바쿠)를 열었다. 그는 도요토미와는 달리 축소지향적인 인물이었다. 도요토미가 확대지향적이거나 아직 세력되지 못한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자였다면, 도쿠가와는 내향적이며 축소지향적인 쇄국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류큐의 이중속국화가 도쿠가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는 어쩌면 쇄국주의자가 아니라 도요토미보다 훨씬 세련되고 노련한, 현실주의적인 일본 제1차 제국주의의 완성자였다.

1609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을 받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침략의 주된 이유는 임진왜란시 류큐의 협조거부였다. 4월 5일 수도 슈리성을 점령하고 류큐의 문물을 약탈했다.

류큐 국왕 이하 100여 명의 고관들이 사쓰마번으로 납치당했다가 2년 6개월 후에야 도쿠가와에 대한 복종의 맹세와 서약을 하고 풀러났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충신 정형은 명나라 황제에게 원병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발각되어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도쿠가와는 중국을 부국(父國)이라 부르며 중국에 신복해 오던 류큐를 중·일 양국의 이중종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편 1609년은 조선과 국교회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일본측의 사절단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사절단의 상경을 거절하고 부산포의 왜관에 며칠 머물게 한 후 곧 돌려보낸 사건이 있던 해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1609년 류큐의 침략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다시 살펴보면, 일본은 마치 무턱대고 큰 것을 노리는 것보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차지해나가는 것이 유리하고 현명한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초보적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의 원조격인 도요토미의 팽창 확대지향적 대외정책에서, 1603년 새로 막부를 세우고 전국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수렴과 내실을 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는 1648년에 쇄국을 완성하여 나가사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전체 동아시아의 해외무역주름잡고 있다시피한 류큐를 정치 외교적 명분만은 중국에 양보하고 경제와 무역방면의 실리를 가로채는 교묘한 책략으로써 나라의 살림을 살찌워가고 있었다. 약소국 류큐는 일본 제국주의 야욕이 축소되고 압축된 형태로, 숨쉬고 있는 까만 씨앗과 같은 것이었다.

◇ 중국(적색)과 일본(황색)의 해역 표시도. 출처 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D6%D0%B9%FA%BA%A3%D3%F2%B5%D8%CD%BC&in=


19세기 후반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일본의 본격적 제국주의 침략형태로 미루어보아, 필자는 일본제국주의가 류큐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작은 것이 아름답다. 큰 것보다 우선 작은 것부터 차지하라.
둘째, 정치 군사적 지배보다 우선 경제 무역 면에서 장악하라.
셋째, 대륙의 얼굴이나 심장부보다 우선 그의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여 조금씩 힘을 빼라.

결과적으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실패를 교훈삼아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15대를 세습, 260년의 막부를 일관하였다. 그러나 축소지향적인 도쿠가와 막부를 단순히 작게 한다는 것이라든지, 쇄국한다는 것이 아니라 꼭 가지고 싶으나 그대로는 내 손안에 꽉 쥘 수 없는 것을 ‘축소’시킴으로써, 그 가치, 본질을 획득, 소유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이나 중국대륙을 쥘 수 없어 그 가치, 본질을 류큐로 ‘압축’시킴으로써 확대지향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대한 일본인의 뜨거운 확대지향 팽창주의적 열망을 류큐군도 140여개 섬으로 축소 수렴하여 잠재워왔던 것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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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2010-12-24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