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철학 그리고 명상의 공간

명상소견

Smart Lee 2007. 11. 11. 00:44

 

 

명상소견

 

어느 선사가 있었다.

선사의 제자가 하루는 청했다.

'스승님, <명상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요'

 

선사는 마당의 나무 한그루를 가리키며,

'저 나무와 같으면 된다' 하였다.

 

그날 이후 제자는

나무를 바라보며

골똘히 연구에 들어갔다.

'대체 이 나무의 

무엇과 같으라는 것인가?'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제자의 머리 속에는

이 '나무와 같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많은 날들을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와 같음'에 대하여 이리저리

온갖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제자는

도무지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선사의 가르침을

포기한 제자는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나무에 기대어 섰다.

 

나무의 따스한 기운과

그 고요함이 제자의 등으로

무심히 전해져 왔다.

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무수한 질문과 의문 속에서

찾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진의'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나무와 같음'을 터득하였다.

 

제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선사를 보고는

넙죽 절을 올렸다.

 

'허허..., 나무가 절을 다 하는구나'

선사는 흐믓하게 그곳을 지나쳤다.

 

 

명상의 비결이란,

폼나는 자세에 있지 않다.

다리를 어찌어찌 꼬고,

손을 어찌하고, 허리를 어찌하고,...

또한 숨쉬기에 있지도 않다.

배를 불룩하게, 단전에 기를 모아,...

더더욱 '어떤 생각'을 함에 있지도 않다.

'머리꼭대기 20센티 위에

밝고 흰 빛이 떠있고...'

 

그 모두는 결코 명상의 핵심을 모르는

'명상 교육가'들의 서투른 짓거리들이다.

 

명상의 비결은,

자세에도, 숨쉬기에도,

또한 상상이나 생각하기에도 있지 않다.

'무심'하게 있고자 하는 노력도

명상에는 아무 도움되지 못함이다.

 

그 핵심 비결은

바로

'있는 원형 그대로의 복귀'에 있다.

 

그것이 바로 선사의 가르침인

'나무와 같음'의 비결이다.

 

우리는 태어나 지금 이 순간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 본래의 모습과 <상>으로부터

너무나도 동떨어진 상으로 변형되어 왔다.

마치 화분에 심겨진 분재나무가

오랜 기간의 다듬어짐으로 인하여

그 원형을 잃어버림과 같은 것.

 

현대 사회의 교육이란

마치 그대를 달구고 망치질하여

그저 '쓰기에 좋은'

도구 하나로 변형시키는 데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것에 지나지 않다.

 

해서,

명상이란,

이 일그러진 <상>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원래의 <상>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말한다.

 

그대의 일그러짐을

치유하는 하나의 과정이며,

손상된 그대의 <상>을

복원하는 지극히 소중한 것이다.

 

그 <상>은,

우리를 구성하는 육신의 상과,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의 상과,

그리고 그 두가지를 주관하는

<나>라고 하는 상의 세가지인데,

육신과 마음의 상이

<나>와 너무나도 어긋나 있는

그 왜곡된 것을

본래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그 <원형>으로

되돌려 놓음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은

필히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새벽이나 밤중에,

아주 조용하고 한가한 시각에

그저 평안하게 앉거나 누워서

자신을 구성하는 이 두가지,

육신과 마음의 <상>을

신이 부여한 그 원형의 상태로

복원시켜보라...

 

순수함 그 자체로

되돌아 가보라.

그대의 <원형>을 되찾아

그 원래의 맑고 밝고 순수한

형태로 되돌아 가보라.

어린 시절의 그대가

거의 그 원형의 순수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그 상태로 돌아가 보라.

 

마치

한그루의 나무나

푸르른 산이나

맑고 깊은 강이 되듯이...

 

매일 습관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아무 이유없는 희열이 찾아 오리라.

 

그 희열을 그대로 그대 속으로

맞아 들이면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희열'이 바로

그대 원래의 본성인 것이다.

부처는

그곳에 있다.

예수의 사랑이

바로 그곳에서 넘쳐난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비결이요,

그것이 바로

<명상>이 존재하는 원인이다.

 

올바른 명상은

어떠한 '새로운 시도나 노력'이 아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것들은 그저

자신을 최면시키거나

자아라는 욕심의 발전기를

잠시 만족시키는 것들일 뿐이다.

 

바른 명상은

그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그 원상으로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원상복귀>의 과정일 뿐이다.

 

그로써 비로소

'원래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르게 볼 수 있으므로...

 

인터넷을 항해하다가

너무나 많은 <명상비법>들이

범람하는 것을 보고

공연한 안타까움에

소견을 펼쳐본다.

 

<낙천  2000.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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