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

Smart Lee 2010. 4. 28. 13:05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

 


동경 유학 시절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생들로 그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인 유학생들 중에 몇몇이 모여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하였다. 1927년 1월이었다. 그들은 매주 모임을 가지고 성서를 함께 공부하며 조국 조선의 희망을 성서 속에서 찾으려 하였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일본을 성서위에’ 세우는 운동에 인생을 걸었듯이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성서의 진리 안에서 열어 나가고자 성서조선 운동을 펼치기로 다짐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부터‘성서조선’이란 제호로 동인지를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임의 좌장격이었던 김교신(金敎臣) 선생이 창간호에 창간사(創刊辭)를 섰다. 그 글에서 김교신 선생은 다음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조선에 줄 바 가장 귀한 선물은 신기하지도 않은  ‘구약성서’ ‘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다. 그러므로 걱정을 같이하고 한 곳에 소망을 두는 어리석은 5, 6인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촌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지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를 기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온 지 반년 남짓하여, 누군가가 동의하여 그간의 소원이던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코자 하여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던 때의 그의 나이 불과 26세 되던 때였다. 1901년 3월에 태어난 김교신은 18세였던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에 노방전도를 받아 크리스천이 되어 세례를 받은 후로 7년간 우찌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서공부반에서 청강하였다. 1927년 동경사범학교 지리과를 졸업하던 해에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간케 된 것이다.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 ②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지의 창간호에 쓴 창간사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 쓴다.
 
“『성서조선』 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집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국인을 예배하고 ‘성서’ 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 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유한 조선인에게로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 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동지를 한 세기 후에 구한들 무엇을 한탄할손가?(1927년 7월 창간호)
 
더러는 이르기를 김교신은 무교회사상(無敎會思想)을 퍼뜨린 인사이기에 배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성한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흠집을 내는 사상이라고 그의 사상을 규탄하기도 한다. 물론 그의 생각과 행동에도 그릇된 부분이 없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에도 그를 반드시 본받아야 할 바가 있다. ‘조선혼을 품은 조선 기독교인’을 강조하면서 예수사랑과 겨레사랑을 한 인격, 한 신앙, 한 비전으로 품으려 하였던 뜨거운 가슴이다.
 
우리들이 함께 사랑하며 함께 섬기는 한국교회는 자랑스런 교회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회이요 가장 열심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몇 가지 고쳐야 할 점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교회사랑에 비하여 겨레사랑이 뒤쳐지는 점이다. 복음적인 정열에 비하여 역사의식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김교신 선생을 중심으로 하였던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의 동지들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 ③

 


1927년 동경사범학교를 졸업한 김교신 선생은 이듬해에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지리선생으로 부임하였다. 선생은 지리과목을 가르치는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한반도(韓半島)의 지리적 특성을 가르치며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형세가 토끼의 모습이라 가르쳤으나 김교신 선생은 대륙을 향하여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라 강조하며 민족웅비(民族雄飛)의 기상을 학생들에게 불어 넣으려 힘썼다.

양정학교에서 반 담임을 맡았을 때에 선생은 반 학생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고 매일 새벽에 학생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드리고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개별지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행하였다. 그렇게 하니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 학생 중에 손기정이란 이름의 학생이 있었다. 그가 마라톤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는 수시로 격려하며 마라톤으로 겨레를 빛내라고 힘을 북돋워 주었다.

1935년 손기정이 한반도를 대표하여 동경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출정케 되었을 때에 담임선생이었던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가 달리는 동안 풀코스를 자동차로 동행하며 격려하였다. 반환점을 돌고난 얼마 후 달리던 손 선수가 지쳐 쓰러지려 할 순간이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이 소리를 높여 독려하기를 “기정아! 기정아! 조국을 생각해라. 조국을 생각해라. 힘 내라, 힘 내라.”고 울먹이는 소리로 독려하였다. 그 소리에 힘을 얻은 손기정은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어 일등으로 골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회에서 1등이 되었기에 다음 해에 베르린 올림픽에 출전케 되어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 ④

 


1927년 1월 김교신,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하였던 동지들 중에 송두용(1904~1989)이 있었다. 그는 충북 영동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았다고 말할 정도로 부잣집이었다. 그도 우찌무라 간조의 성서공부모임에서 신앙을 체득하였다. 1930년 우찌무라가 타계하였을 때에 그가 기고한 글 ‘은사 우찌무라 간조 선생’에서 스승에게서 ‘살아 있는 신앙’을 배웠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그 많던 땅을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성서에서 읽은 바대로 실천하려는 뜻에서였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그렇게 하였기에 ‘송두용이 조선의 톨스토이’란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성서조선운동의 핵심 인물 중에 함석헌은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웬만한 분들은 학생시절에 한번씩은 대하였을 책이다. 이 책이 처음에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란 제목의 책이었으나 후에 이름이 바뀌어졌다.
 
6.25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 이 책이 출간되던 때에 머리말에서 저자는 다음같이 쓰고 있다.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여남은 되는 믿음의 동지들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 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벨론 시냇가 언덕 위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다. 밖에서 오는 억누름, 안에서 오는 슬픔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 때에 쓰디쓴 입에 붙이어 간추려서 우리 역사의 뜻을 말해 보자는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한 사람이요 지금은 땅에 있지 않은 김교신님이 그 다달이 내는 『성서조선』지에다 이어 실었다. 광고도 선전도 아니하는 그 잡지는 읽는 이가 고작 많을 때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10-04-15~18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