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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원 사재 기부한 원로배우 신영균

Smart Lee 2010. 10. 5. 22:13

500억원 사재 기부한 원로배우 신영균

5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재산을 영화계에 선뜻 내놓기로 한 원로 배우 신영균 씨(82)는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 35년 전 자신이 인수한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5일 기부 기자회견을 연 그는 시종일관 뿌듯한 표정이었다.

"살아보니 돈이 다가 아니더군요. 제 나이 80이 넘어가니까 좋은 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늘 생각했어요. 치과의사도 했고 영화배우, 정치도 다 해봤지만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영화입니다. 죽기 전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꼭 하고 싶습니다."

 
신영균 씨는 전날 자신의 개인 재산인 명보극장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을 재단 설립 형태로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명보극장(명보아트홀)을 계속 영화 관련 건물로 유지하고 세계에 경쟁력 있는 영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들 자산의 시가는 500억원으로 추정돼 '통 큰 기부'로 사회에 훈훈한 귀감이 되고 있다. "영화인으로서 재산이 많다는 것이지 재벌 축에도 못 껴요. 40년 가지고 있던 재산이라 굉장히 애착이 있던 건물입니다."

흔쾌히 기증에 동의한 가족이 고맙기만 하다. "아내는 '장한 일' 했다고 격려했고 아들은 속 깊은 효자예요. 우리 딸은 아버지 정말 멋쟁이라고 하고 손녀는 존경한다고 말하더군요."

32세인 1960년 '과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신씨는 '연산군'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주옥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60~70년대 톱스타로 300여 편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평생 큰 굴곡 없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크게 모험을 안 해서인지 살아오면서 크게 실패한 것은 없어요. 투기라든지 무리한 사업도 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남의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는 "영화배우로서 정직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다. "인기 있을 때는 좋지만 나이 먹고 인기 없어지면 외로운 것이 배우 아니냐"는 잔잔한 소회도 풀어냈다.

그는 최근 영화계에 대해 "치고 받는 것만 있고 스토리가 부실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재단 명칭은 '신영균문화예술재단'(가칭)이며 운영 방식과 주체는 논의 중이다. 재단 구성에는 박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과 아들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회장이 참여한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명보극장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의 운영을 맡고 있는 신씨의 장남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회장뿐 아니라 신씨의 부인, 딸, 손녀 등 가족과 이덕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정인엽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박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배우 안성기 씨 등이 참석해 '좋은 일을 한 원로 배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2010-10-05 매일경제 이향휘 기자/사진 김호영 기자]
 
사재 500억원 기부한 배우 신영균

"극장은 영화인의 꿈..영화인 위해 쓴다면 보람"


"기부하려면 애착 있는 걸로 해야지 아무 건물이나 하면 뜻이 없잖아요. 영화인이니까 건물을 영화인을 위해 쓴다면 보람이 있겠어요."


원로배우 신영균(82)이 문화예술계에 기부하기로 한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옛 명보극장)과 제주도의 신영영화박물관은 가치가 500억원 가량으로 영화계에서 나온 기부액으로는 가장 크다.


특히 명보극장은 충무로의 전성기를 이끈 중심 극장이었다는 상징성이 있다.


 

 

신영균은 5일 명보아트홀에서 사재 기부 의사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한 뒤 기자들을 따로 만났다.


"극장은 영화인들의 큰 꿈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빨간 마후라'도 다 여기서 했어요. 돈을 떠나서 애착이 있는 건물입니다."


멀티플렉스 시대를 맞아 스카라극장 등 주변 극장들은 다 헐리면서 옛 모습이 사라졌다. 명보극장도 명보아트홀로 바뀌면서 영화가 아닌 공연장으로 변신했다.


그는 "옛날엔 명보극장 하면 제일 잘되는 극장이었는데 요즘 극장 문화가 바뀌었다"면서 "이 건물을 영화관으로 다시 할 수 있으면 해볼까 하고 생각하고도 있지만 그건 재단에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건물이 시가로 치면 액수가 많은데 팔기보다는 이걸 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희극인 김희갑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개봉관을 잡을 수 없어 고생했다는 일화를 공개하면서 그때부터 극장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말했다.


30여년 전 명보극장을 인수하기 전에는 극장 옆에서 부인 김선희씨가 명보제과를 꾸려갔다고 했다.


그는 "빵집이 아주 잘 됐다. 우린 검소하게 산다고 명보제과 3층에서 생활했다"면서 "집사람이 진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신영균은 기부를 생각한 것은 오래됐으며 특히 팔순에 접어들면서 "마지막으로 크게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면서 "나이가 있는데 미리미리 해놓고 인생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을 탄 '상록수'와 '빨간 마후라', 흥행 성적이 좋았던 '미워도 다시 한번'을 들었다.


그는 치과의사로 개업까지 했다가 영화배우가 됐다. 이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치과대에서 공부한 것도 근 10년이고 예총 회장도 근 10년 했어요. 국회의원도 8년 했는데 영화배우를 한 20년 했으니 제일 오래 했죠."


신영균은 '과부'(1960)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1970년대말까지 '연산군'(1961), '상록수'(1961), '열녀문(1962), '빨간 마후라'(1964), '갯마을'(1965) 등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3차례에 걸쳐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대종상 공로상,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2010-10-05 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500억 기부’ 신영균 “돈이 전부 아냐..좋은일 해야 하지 않겠나”

원로배우인 신영균(82)이 사재 500억원을 사회에 환원키로 해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5일 자신이 운영 중인 서울 충무로 명보아트홀(구 명보극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명보아트홀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한다"고 밝혔다.

 

기증한 극장과 박물관은 부동산 가치만 500억원이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한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것을 가족들의 배려로 실천에 옮겼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이제 나이 팔십도 넘었으니 좋은 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오늘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기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종원 총장의 주도하에 공익재단의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기부를 결심하게 됐나.

"오랫동안 생각해오다가 이번에 가족회의를 통해 기부를 결심했다. 명보극장은 35년 전에 인수했다. 영화배우로선 어려운 꿈을 이룬 것이었다. 배우로서 돈이 좀 있지만 재벌은 아니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들어주고 잘 살도록 축복해준 하느님과 아껴줬던 영화인들을 위해서 쓰고 싶었다. 내 나이가 이제 팔십이 넘었으니 좋은 일을 하고 가야하지 않겠나"

-전에도 기부를 했다던데.

"결혼한지 55년이 됐다. 칠순·팔순잔치 같은 거 안했으나 금혼식만은 하려고 호텔까지 예약했는데, 우리가 써서 없애버리는 것보다 기부해서 여러 사람이 한 그릇이라도 나눠 먹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부하고 나니까 굉장한 행복감을 느꼈다."

-기부금 운영계획은.

"난 기부를 했고, 나머진 박총장이 잘 해주리라 믿는다. (박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아주 투명하고 공익성이 유지되는, 더 나아가 우리의 영화 및 문화 예술을 해외에 잘 알릴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재단 설립을 생각하고 있다. 오늘부터 의견 수렴하겠다."

-가족들의 반응은.

"아들과 딸이 '아버지 참 잘 결정하셨다'며 환영했다.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 멋쟁이다.존경한다'고 했다. 뜻을 따라준 가족에게 감사하다."

-다시 연기할 계획은.

"치과의사·배우·정치인 등 다 해봤는데 그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면 영화배우를 하겠다. 지금도 죽기 전에 꼭 한 작품 하고 싶다. 오래전부터 고르고 있는데 나한테 맞는 게 없다. 좋은 시나리오 알려달라."(웃음)

▶신영균은?

신영균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부친이 별세한 후 모친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 흥인초, 한성중·고를 다녔다. 이어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치과의사로 활동하다가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 데뷔했다.

이후 '연산군' '상록수'(61)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62) '빨간 마후라'(64) '미워도 다시한번'(68) 등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0년간 출연한 작품만 294편이나 된다.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각각 3회 수상했다. 아시아영화제에서도 두차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68년부터 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이어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예술인의료보험조합을 결성했다. 15대와 16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에도 참여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김선희 여사와 아들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회장, 딸 신혜진씨가 있다.  

(2010-10-05 일간스포츠 김인구)

 

500억 사재 기부 기자회견에 참석한 많은 원로배우들

 

(2010-10-05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