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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영 기자의 "매몰비용(sunk cost)"

Smart Lee 2010. 11. 27. 20:47

이여영 기자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매몰비용(sunk cost)
                                                                                                                 이여영

보복과 폭력으로 점철된 우리 영화 속에서 얼마 전에 우리 영화 한 편을 봤다. 워낙 인기가 있던 영화였다.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선택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다. 영화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화 관객 대부분을 차지했던 젊은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멋지다’는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영화뿐만이 아니다. 최근 우리 영화 대부분은 복수와 폭력을 다루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TV라는 매체의 특성상 폭력의 수위가 낮을 뿐, 줄거리 구조는 복수와 폭력이 주조를 이룬다. 어느 샌가 복수와 폭력이 우리 대중문화의 핵심 코드가 돼 버렸다.

 

물론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에 희생당한 사람을 위해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는 한 때의 유행은 아니다. 대중문화계에서 언제나 인기를 끌어왔던 소재다. 그런데 요즘의 복수와 폭력에는 전과 다른 패턴이 있다. 우선은 당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보복한다는 점이다. 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것으로는 성이 차질 않는 모양이다. 최근 우리 영화의 폭력성 논란이 전례 없이 고조된 것 역시 이 패턴과 관련이 있다. 보복을 위한 폭력을 지극히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잘 생긴 주인공이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위해 나서면 그의 불법이나 잔학무도함도 아름다움으로 바뀐다.

 

우리 대중문화가 복수와 폭력에 빠진 이유는 뭘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힘>,< 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이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사회의 범죄가 갈수록 극악무도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크게 보자면 복수가 용인되고, 폭력이 절실해지는 우리 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는 결국 사회상을 비추는 거울이니까. 실제로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복수를 다짐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고, 적은 가차 없이 쳐야 한다는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데 복수와 폭력을 권장하는 우리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복수와 폭력은 더 강한 복수와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기왕 벌어진 일,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

 

다행인 것은 한 사회에서 복수와 폭력의 강도가 더 심해질수록, 그에 반해 관용과 화해를 부르짖는 목소리도 높아지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복수와 폭력은 그 악순환이 거듭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매몰비용(sunk cost)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동네 빵집을 얼마간 하던 자영업자가 장사가 안 돼 업종 전환을 한다고 해보자. 냉면 전문점으로 바꿔 재개업을 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외부 간판은 물론 내부 인테리어도 모두 바꿔야 한다. 재료도 다시 사들여야 한다. 냉면 전문점 개업 여부를 고민할 때, 동네 빵집을 하는 데 들어갔던 돈을 고려를 해야 할까? 해서는 안 될까?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고려한다. 빵집에 들어간 돈도 비용이니까, 돈을 웬만큼 많이 벌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는 빵집 비용을 감안하면 안 된다. 그건 이미 발생한 비용이다. 어쩔 수 없는 비용이다. 냉면 전문점 개업 여부는 새로운 시설을 갖추는 데 드는 비용과 개업 이후 발생할 수익만을 비교해 결정해야 한다. 빵집에 들어간 돈을 매몰비용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사로 매몰비용을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군가와 오랫동안 만난다면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그게 아까워서, 별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매몰비용을 고려한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고 나서도 상대방에 대한 증오의 감정 때문에 쉽게 마음의 정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새롭게 만난 상대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이 때는 증오의 감정 자체가 매몰비용이다. 이것도 미련한 처사다.

 

(2010-11-25 넷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