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은 내륙확장, 등소평은 해외진출, 강택민은 내륙개발...
중국의 붉은 꽃
공산주의가 어떤 몰골로 남아 있을까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대국 중화인민공화국에 가 보았더니
공산주의 세 떨기 붉은 꽃
프롤레타리아독재, 계급투쟁, 폭력혁명은 다 지고 없고
그들의 노랫가락 속에는 옛날 것만 남았더라
중화사상, 천하통일, 실용주의만 남았더라
그것도 돈독만 잔뜩 올라 남았더라.
- 강효백
중화사상은 무엇인가
중화사상은 천하통일, 실용주의와 함께 반만년 중국의 시공을 일관하는 가장 뚜렷한 흐름이고 원동력이자 중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빠뜨려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중화사상은 한마디로 중국이 원형(圓形)의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자존심 충만한 세계관이다. 원래 자존심이란 배타도 교만도 아니다. 자존심은 자기 확립이고 자기 강조다. ‘나’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강력한 신념, 그것이 곧 자존심이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국가와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이 상대의 도를 넘어 독선으로 치닫고 자존을 균형잡아 주는 겸허를 잃은 순간 자존은 교만으로 변해버린다.
중화사상도 다른 각도로 뒤집어 보면, 자신만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중화라 부르고 주변 이민족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송두리째 열등한 오랑캐로 경시해온 중국인의 혈맥 깊은 곳에는 교만성이 잠재하고 있다.
중국, 중국인은 짧게 잡으면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여 중화질서에 첫 균열이 가기 시작한 187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 길게 잡으면 아편전쟁에 무참히 패배한 1840년부터 20세기 말엽까지, 약 70~150여 년간을 제외하고는 자존심과 교만성이 매우 강한 국가, 민족이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국가‘중국(中國)’을 이루었던 8세기 무렵 당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중화사상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민족국가사회의 융합을 위해 무한히 확대재생산이 필요한 자아도취성 이데올로기다.
모래시계 또는‘역(逆)’Z형이라 할까. 중화사상을 불멸의 국가융합에너지로 삼아 찬란한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현대중국은 지역개발전략과 대외정책의 주력방향을 연계하여 전환시키는 특유의 궤적을 보여 왔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서남방의 내륙 확장에, 제2세대 덩샤오핑((鄧小平)은 동남방의 해외 진출에, 제3세대 장쩌민(江澤民)은 서북방의 내륙 개발에 주력했다면 지금 후진타오(胡錦濤)를 비롯한 제4세대 지도층은 동북방의 진출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중국의 제5세대 지도층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 8세기 성당(盛唐)시대 실크로드, [中國綜合地圖集]. 2000. 中國地圖出版社. (중국정부발간 국정 지도책) p.183 스캔. 발해가 토번, 돌궐 등과 함께 당나라의 영토로 표기(연노란색 부분)되어 있다. 특기할 사항은 오른 쪽 하단에 유독 ‘신라’를 고국명(故國名; 옛날 나라이름)으로 명기하여, 인도, 페르시아 등 여타 국가는 제쳐놓고 신라만 ‘국가’로 기재하고 있다. 더구나 육상 실크로드의 기점과 종점을 신라 ‘경주’로 표시하고 있다. |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인민복을 입은 공산황제, 마오쩌뚱의 지역개발전략의 기본 이론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식 계획경제 이론에 입각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균부론(均富論)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중국인민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균빈론(均貧論)’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식 계획경제이론 자체가 ‘균빈론’의 숙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대외전략 기조는 군사력을 앞세운 전방위적 팽창주의였다. 마오는 측근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인해전술의 대군을 파병하여 광활하고 윤택한 동북(만주)을 차지하였다. 덤으로 마오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인, 동북왕 가오강(高崗)을 숙청하고 북한지역을 세력권 하에 두었다.
그런 후 마오는 서남방의 영역 확장에 눈독을 들였다. 일찍이 국민당군에 쫓기며 서남부의 17개성의 18개의 산맥과 준령을 넘은 2만 5천리 대장정시절에 품었던 야심 때문이었을까. 1959년, 마오는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중국 전체 면적의 8분의 1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오는 멈추지 않았다. 서남방 더 먼 곳으로 여세를 몰아붙였다. 1962년 10월 인도를 침공하였다.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온 중국군은 3천명의 인도군을 사살하고 4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적을 세웠다. 서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고 퇴각하였다.
마오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도 일격을 가했다. 1969년 3월 우수리 강, 강 가운데 섬인 다만스키(중국명 珍寶島·전바오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대규모 군사 충돌로 이어졌으나 핵전쟁 발발을 우려한 양국 지도자들의 회담으로 분쟁은 봉합되었다.
1974년 1월 중국은 돌연 남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월맹)의 서사(西沙·Paracels) 군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편입시켰다.
웬일로, 중국이 해양과 바다의 섬에도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일수교와 닉슨 미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있은 지 2년 후, 마오가 사망하기 2년 전의 일이다.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마오쩌둥의 비판적 후계자 덩샤오핑은 서남방에서 동남방으로, 닫힌 뭍의 내륙에서 열린 물의 바다로 나아갔다. 덩은 집권 이듬해인 1979년 2월 동남쪽의 베트남을 총 2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침략군은 개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약 4만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세계최강의 미국을 패퇴시킨 통일 베트남의 저력을 얕보았던 것이다.
덩은 베트남에게 교훈을 준 이른바 ‘교훈전쟁’이라고 자위했으나 대국으로서 체면을 구긴 사실상의 패전이었다. 기실 교훈의 수혜국은 베트남 보다는 중국이었다. ‘교훈전쟁’에 큰 충격을 받은 덩샤오핑은 그 후부터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는 내실우선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전쟁 이후 중국 대외정책의 중심도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의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수렴되었다. 덩은 동남부지역의 발전을 내륙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내걸었다. 마오의 균부론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균빈론이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바다에 동남부 3개성에 5개의 자본주의 섬, 즉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하이난 등 경제특구를 설립하였다.
덩샤오핑은 1984년과 1987년, 각각 절묘한 홍콩, 마카오 흡수 통치이론인 ‘일국양제(一國兩制)’로써 중국-영국 공동성명과 중국-포르투칼 공동성명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용이라면 여의주로 비견되는 홍콩을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반환받는 위업을 거두었다.
또한 중국은 1988년 3월, 남사(南沙·Spratlys)군도 7개 섬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1992년 중국 영해법으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1988년,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가 류큐군도의 최남단 센카쿠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행위에 대해 중국은 민간 차원에서, 그러나 조직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를 하게끔 조정하였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그의 집권기간 내내 동남방의 바다를 향하여 일관된 정향성을 유지하였다.
제3세대, 서북방 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와중에 집권한 장쩌민은 열린 물의 바다가 부담스러웠던지 다시 닫힌 뭍의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북방 내륙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부익분 빈익부, 양극화의 선부론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지역간 균형발전의 ´신균부론’에 입각한 ‘서부대개발’을 내세웠다.
서부대개발의 핵심은 낙후한 서북지역의 위구르 자치구를 비롯한 소수민족밀집지역의 불만을 완화하고 사회 안정과 국경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1996년 장쩌민은 서북 국경과 인접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국가원수들을 상하이에 불러내어 상하이-5 회담을 주도하였다. ‘서북 국경지대 군사부문 신뢰강화에 관한 협정´과 ´국경지역 군대감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회담은 2001년 우크라이나를 포함시킨 ‘상하이 협력기구’(SCO)로 확대 개편하였다. 중국의 지명을 딴 첫 국제조직을 국제무대에 등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장쩌민이 심어둔 서북확장의 묘목은 어느새 자라나 최근 10년 새 중국은 러시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경계를 확정하며 3천여 ㎢ 영토를 새롭게 획득하는 등 서북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
제4세대,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내다
장쩌민의 동향 후배로 2003년 집권한 후진타오는 서북에서 동북으로 방향을 확 틀었다. 망막한 사막과 설산지대로 꽉 막혀있는 중국의 서부는 젖과 꿀이 철철 넘치는 미국의 서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평화적으로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崛起)의 기치를 들었다. 화평굴기의 본질은 ‘평화’라는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주의’이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던 중국의 대외정책이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극적 공격적인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중국의 대외정책 기조가 수렴의 제2, 제3세대와 달리 팽창의 제1세대로 복귀한 것이다. 특히 동북아지역은 중국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지역질서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가장 우선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6자회담장을 마련하고 중국은 의장국으로 등극하였다. 장쩌민 시대의 상하이협력기구가 ‘서북6자회담’이라면 후진타오 시대의 북핵6자회담은 ‘동북6자회담’이라고나 할까.
후진타오는 국내적으로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균형발전전략의 틀을 수립하고 동북3성의 인프라를 개발하는 동북진흥전략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동북3성의 고구려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사왜곡작업의 일환인 동북공정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진흥과 동북공정이 팽창의 대외정책, 화평굴기와 맞물리며 원래의 지역경제발전이나 역사왜곡의 수세적 범위를 뛰어넘어 한반도까지 공세적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다. 북한의 존재가치를 중국에 대한 안보 위협을 줄여주는 완충지대에서 중국모델의 이식과 팽창욕구해소의 최전선으로 변환시키려는 동향은 후진타오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다.
제5세대, 중국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내년 가을에 출범할 중국 제5세대 최고 지도층의 대외정책주력방향은 어디로 방향을 틀 것인가? 포스트 후진타오-원자바오 팀을 이어 중국을 이끌 시진핑-리커창 팀은 육해(陸海) 양면으로,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여는’계왕개래(繼往開來)로 나아갈 것으로 예견된다.
육지 쪽으로는 동북지향의 제4세대를 계승하여 북한으로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제5세대는 ‘동북3성 개발’이라는 지역개발전략을 넘어 ‘북한의 동북4성화’라는 대외확장노선으로 전환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많은 자원을 장기적으로 계약해서 탄광개발권, 동해 어업권 등을 확보한데 이어 2009년 나진항을 50년 조차를 해두었다.
베이징-단둥 고속철도를 비롯하여 동북3성 내의 교통 통신 발전소 항만 등 인프라구축 준공시한이 제4세대 집권 마지막 해인 2012년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단둥-평양, 단둥-원산, 투먼-나선, 창바이-김책 등 동북3성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을 땀땀이 꿰매 내려가는 고속도로와 철도건설 준공시한은 제5세대 집권 기간 중으로 맞춰 놓고 있다.
한편으로 제5세대는 해양대국화에 몰입할 것이다. 그들은 덩샤오핑 시대의 해양진출유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남서군도 뿐만 아니라 류큐 해역으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7일,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충돌하면서 중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저자세에 가까운 타협안을 내놓아 미봉되었으나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대규모 반일 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환치우시바오>(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각종 언론매체에는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의 독립 또는 중국에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특집기사와 칼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년 11월 16일 일본의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아사히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중국해군이 노리는 것은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이다”라고 입을 모아 성토했다. 니시오간지(西尾 幹二)와 같은 극우파 인사는 “중국은 언제라도 류큐를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런 중국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라고 공언하고 있다.<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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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2011-04-30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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