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6.25 참전 이유는 동북지방 만주 확보와 친소파 정적제거
강효백 경희대 교수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조선)이라 한다. 동국의 사람으로서 중국으로 가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 부러워하면서 치하를 드리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그 이른바 중국이라는 중은 어디를 기준으로 하여 중이라 하며, 동국이라는 동은 또 어디를 기준으로 하여 동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중국이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가리킴인가?”
우리에게 중국은 우방인가? 일단 외견상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 외교관계등급상, 각종 인적 물적 교류 지표상으로 볼 때 우방이라고 해야만 자연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한중관계는 1992년 수교이후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가까워져왔다. 한반도의 자유민주 북진통일을 일보직전에서 좌절시켜 분단상태를 지속시켜 버린 원흉, 붉은 오랑캐 ‘중공’이라는 주적관계에서부터 경제·통상 중심의 선린우호를 거쳐 1998년 협력동반자관계로 들어섰다.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승급되더니 2008년 양국 정상의 상호국민방문을 계기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 양국의 전략목표가 상호이해에서 상호공유로 승격되는 한편 양국이 맺을 수 있는 최상위 수준까지 발전한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중-러시아보다는 못하지만 중-미나 중-일, 중-캐나다 관계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한 대중무역액은 대미무역과 대일무역액을 합친 규모를 훨씬 초과한지 이미 오래이며 갈수록 양적 질적으로 가속도가 붙어 늘고 있다. 그리고 2010년말 현재 중국의 한국유학생은 약 8만명이며 한국의 중국유학생은 6만명에 육박하여 상대국가의 유학생 중 최다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묻는다. 중국은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인가? 이번에는 대부분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예 솔직히‘우방은 무슨 우방?’라고 답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한-중 양국의 외견상 친밀도와 실제로 느끼는 애정지수의 체감온도는 어쩌면 반비례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5월 20일, 그래도 명색이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인데 김정일의 방중 일정도 통보를 하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최근 양국간의 관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면에서 왠지 모르게 서먹하고 뜨악하다.
이를 양국 정부의 공식적 비공식적 외교채널의 부재로만 나무랄 수 없는 뭔가 근본적이며 만성적인 고질병 같은 게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60년이 지나도 씻기 힘든 트라우마(trauma·집단적 상처 또는 정신적 외상),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때문이다.
역사의 미스테리, 만신창이 중국이 6.25 참전한 진짜 이유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의도로 6.25에 참전했던 것일까. 사회주의 진영의 수호를 위해서, 소련의 파병종용 때문에, 이른바 순망치한의 지정학적 안보 이익을 위해서 등등을 국내외의 고명한 정·관·언·학 인사들이 수없이 반복하며 거론하여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것들만으로는 중국의 그 부나방같은 6.25 참전이유를 설명하기에 2%는 어림없고 20% 이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짧게는 8년간의 항일전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 길게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 100여년 간 지속되어온 전천후 전방위적 외침과 내란으로 기진맥진의 정도를 넘어 만신창이 상태였는데다가, 건국된 지 한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신생 정권이 당시 친소일변도인 북한 정권을 도우려고 세계최강 미군을 위시한 16개국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 할, 국가의 존망을 건 사투를 벌려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까.
인류의 보편적 합리적 이성적 가치판단의 잣대로는 도저히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중의 미스터리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참전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조차도 ‘아주 적다’라고 오판했을까.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필자는 마오쩌둥과 동북(만주)과 가오강(高崗), 타이완과 장제스와 관련된 지정학적 인식과 중요성, 은원관계를 최근 공개된 중국내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풀어보고자 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중국은 지방군구를 중심으로 크게 동북, 화북, 화동, 중남, 서북, 서남 6대 행정구로 구분했다. 화북만 중앙이 직접관할하고 그중에서 가장 노른자 자리인 동북지역의 당·정·군 최고 책임자를 친소파의 거두인 가오강이 담당하였다. 동북지역은 풍족한 자연자원에다가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과 소련군의 무혈개입 등으로 산업화가 잘 전개 보존된 지역일 뿐만 아니라 당시 최신 장비로 무장된 25만여명의 정예병력을 지닌 제4야전군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가오강은 공산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숙청되고 1954년 자살로 비극적 생을 마감하였던 중국 최고위급 정치군사지도자이다.
건국 전 3개월 전, 1949년 7월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가오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동북이 소련의 17번째 가맹 공화국으로 편입될 것과 칭다오항에 소련 함대를 파견하고 소련이 점유하고 있는 뤼순과 다렌항에 소련군 병력을 증파하여 미국의 위협에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류는 가오를 매국노로 질타하며 그의 발언을 베이징에 보고했다.
그러나 마오는 보고서조차 읽지 않은 듯 가오를 더욱 우대해주고 국가부주석을 겸직시켜 주었다. 1949년 9월 마오쩌둥은 동북지역의 모든 가정과 공공건물에 스탈린의 초상화만 걸려있고 마오의 초상화는 전혀 걸려 있지 않으며 동북은 중국이라기보다는 소련의 일부처럼 보인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마오는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가오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는 소련관련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949년 12월 초 모스크바 방문길에 오른 마오쩌뚱은 선양에 도착하여 시찰하는 동안 마오는 스탈린의 초상화만 보았지 자신의 초상화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외지인에게 동북은 중국보다 소련의 일부처럼 보였다. 또한 가오는 동북인민정부 단독으로 소련 중앙정부와 국제무역협정을 체결하는 호기를 부렸다. 중앙정부의 지시를 묵살하기 다반사였던 가오는 베이징의 방문요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는 대신 선양으로 와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앙군구와 타 군구소속의 병력과 군수물자의 동북관내로의 진입을 전면 통제하기도 하였다.
마오가 이처럼 방약무인한 가오를 방치하였던, 또는 속수무책이었던 까닭은 당시 여타 지역을 압도하던 동북의 경제력, 군사력과 아울러 그에 대한 소련의 적극적 후원과 뤼순다렌항에 거점을 둔 소련의 군사기지와 창춘 철도에 대한 소련의 이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당시 마오쩌둥의 제1주적은 소련의 괴뢰 가오강보다는 국민당의 장제스였기 때문이다. 마오는 하루빨리 바다 건너 일본식민지였던 섬으로 도망가 내륙남부와 해안 도서 지역에서 완강한 저항을 조종하고 있는 장제스 국민당 일당을 섬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에 거부당한 김일성, 다시 마오쩌둥 만나 설득
일찍이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해보겠다는 구상을 밝혔으나 스탈린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스탈린이 거부한 까닭은 당시 소련은 핵무기도 없었고(1949년 9월 3일 소련 핵실험 성공),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김일성은 남침 야심을 포기하지 않고 그해 4월 하순 내무부상(차관) 김일을 베이징에 파견하여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에 마오는 중국이 장제스의 잔당을 궤멸하느라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남침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큰 무모한 행위라며 간단한 몇 마디로 김일을 돌려보냈다. 마오쩌둥-김일의 회담시간은 통역을 포함, 총 20분이 넘지 않은 극히 짧은 것이었다.
일부 기존 자료에는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소련 방문시 스탈린과 김일성과 중국 참전에 관한 밀약을 맺었다고 적혀있는데 현재 공개된 구소련 자료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중국측의 자료도 마오쩌둥의 소련 방중의 주요 목적은 타이완과, 신장 위구르, 티베트, 동북(만주) 등지에 대한 소련의 지원과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으며 북한에 의한 무력통일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고, 할 필요성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 1월, 미국 국방부 장관 에치슨은 충격적 선언을 하였다. 그동안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해 해당 국가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의미였던 ´안전보장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산주의 극동방어선이 알류샨 군도에서, 일본열도, 류큐군도에서 필리핀 군도로 이르는 이른바 ‘에치슨 라인’으로 후퇴되었다. 에치슨 선언을 미국이 남한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으로 지레짐작한 김일성은 그해 2월, 재차 소련을 방문한다. 스탈린은 이번에는 김일성의 남침 주장에 동의하였다. 소련에 원자폭탄도 생겼고 미국이 에치슨라인 뒤로 물러난다고 공언하였기 때문이다.
5월 13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은 당일 밤 마오쩌둥과 회담시 스탈린이 남침을 승낙했으며 남침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마오에 대하여 남침 동의만 요구하는 것이지 중국의 원조는 필요 없다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다음날 주중 소련대사를 초치하여 김일성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확인요청하였다. 주중 소련대사는 스탈린에게 유선상으로 통화한 결과 김일성의 발언이 사실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기고만장한 김일성은 세계 공산제국황제인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다고 자부하며 마오에게는 남침의 구체적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고 주로 동북제1서기인 가오강과의 연락을 긴밀히 취했다. 마오쩌둥 역시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1949년부터 6.25전쟁이 끝나고 숙적 가오강을 제거한 1953년까지 중국은 사실상 삼국시대였다. 중국 내지(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마오쩌둥의 공산당, 내륙남부와 해안과 도서 지역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한 장제스의 국민당, 그리고 광활하고 윤택한 동북지역을 장악한 가오강의 친소세력, 중국은 여전히 3분된 상태였다. 마오가 가오를 숙청하여 동북을 완전히 독차지한 1954년에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은 제헌헌법을 제정하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마오는 애시당초 당시 30대 중반인 김일성 출신성분 자체가 가오강보다 더한 극렬 친소파라 경멸했으며(마오가 평생 가장 증오하였던 정적은 친소파였으며 그의 최후 최대의 주적국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때마침 중국의 2번째로 큰 섬인 하이난다오를 점령하여 국민당 잔당의 본부인 타이완 상륙작전에만 모든 정력을 집중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6.25전쟁 발발전 중국과 북한은 수교하였지만 주 평양 중국대사관은 정식으로 개설되지 않았으며 중국 초대대사는 병을 핑계되고 우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북한 측 역시 베이징에다가는 대사관 청사를 물색조차 하지 않고 오직 가오강이 지배하고 있는 동북위원회 선양에다가 상무대표처만 파견하였다. 즉 6.25이전 중국은 타이완을 점령하여 장제스 국민당을 섬멸할 것에만 골몰하였지 한반도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1950. 6.25전쟁 발발후, 중국은 여전히 국민당 잔당과의 전투 중이었다. 6월 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공군과 해군부대는 한국정부를 엄호하고 지지할 것과 미국은 중국이 타이완 침공을 무력으로 결정하였다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28일 저우언라이 총리겸 외교부장은 미국수중에서 타이완을 해방시킬 때까지 전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는 엄포였을 뿐이었다. 미국 지상부대가 실제 참전을 하자 마오쩌둥의 주의력은 타이완에서 동북으로 확 바뀌어버렸다.
아직도 베이징측이나 타이완측의 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6.25전쟁 발발 덕분에 타이완이 적화되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여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중국군의 해군 및 수륙양용작전에 투입될 해병대전력은 0에 가깝고 상륙작전에 동원될 무기수준 역시 형편없었다. 중국군이 역시 섬인 하이난다오 점령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이난다오는 타이완과 달리 육지와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국민당 주력부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중국 공산군 역시 그들 조상처럼 육전에는 선수였지만 해전에는 잼뱅이었다. 중국이 해전에 승리다운 승리를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던가?
불세출의 전략가 마오쩌둥은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마침 미국 지상부대가 참전하자 마오의 눈길은 타이완이라는 작은 섬에서 한족이 주체가 된 제국으로는 한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신천지 저 동북방 광활한 대륙으로 돌렸다. 마오는 8월 11일 중앙군사위원회에 ‘타이완해방 전쟁 연기’를 지시했으며 ‘타이완 해방 ’구호를 잠정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대반전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발생했다. 그간 소련의 하수인, 가오강과의 내밀한 연락을 취하고 베이징에 대해서는 얼마나 신속하게 남한을 공산화하는가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듯 기고만장하던 김일성은 박일우 차수(대장)를 압록강 건너 안동(현재 단동)에 파견해 중국의 파병을 애걸했다. 또한 1950년 10월 1일 새벽 2시 50분(모스크바 시각) 스탈린은 김일성의 구원의 편지를 받는다. 10분 후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처서 중국의 파병을 요청하는 급전을 때렸다. 심야에 받은 급전을 받은 마오쩌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담담한 표정에 약간의 미소마저 담겨있었다고 그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師哲)는 후일 회고했다.
10월 2일 새벽부터 10월 4일 오후까지 마오쩌둥은 중앙서기처와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중난하이에서 마라톤 회의를 개최했다.
먼저 국방위원회 부주석 주더(朱德)가 군사력 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참전을 극력 반대했다. 2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된 미군 1개 군단은 탱크와 70미리 곡사포와 240미리 장사정 방사포 등 각종 고성능 대포를 1500여문이나 보유한 반면 중국 3개 사단, 1개 군단이 갖춘 포는 겨우 198문뿐이다. 또한 미군은 각종 전투기와 폭격기와 1천 백 여대를 동원하여 제공권을 장악한데 반하여 중국은 공군 자체가 없었으며 해군 역시 타이완 침공을 대비해 1949년 말 급조된 것이라는 구체적 상황을 곁들었다.
정무원 총리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도 중국인민은 오랜 전쟁으로 약간의 염전사상이 팽배해 있으며 참전은 세계최강대국 미국과의 척을 지게되어 결국 국제관계에서의 고립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베이징 군구사령관겸 베이징 시장인 에지엔잉도 미국과의 전쟁은 중국을 폐허로 변해버리게 할 수 있는 경거망동이라고까지 격렬히 반대했다. 중국본토의 안전에 위협을 받게 될 경우 참전을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늦게 회의에 참여한 펑더화이, 역시 경거망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소련의 공군력과 물자를 지원받는다는 조건이라면 참전을 검토해볼만하다고 꼬리를 붙였다.
정치국원겸 난징 인민정부시장 쑤위(粟裕)도 중국군이 참전한다 해도 북한군은 중국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며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라면서 참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후일 실제로 동북방어군총사령관의 임명됨에 불구하고 병을 핑계되고 부임하지 않았다.
가오강의 직속선배로서 동북방면의 제4야전군 총사령관이었던 린뱌오(林彪)는 북한은 산이 높고 숲이 우거지고 지형이 동서로 협소하여 북한진입후 작전방식과 국민당과의 작전방식이 많이 달라 작전수행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미군은 국민당군이 보유한 전투기와 탱크, 대포보다 질적 양적 면에서 훨씬 우수하기 때문에 중국군은 더욱 더 많은 희생을 거둘 것이다라며 참전을 극구 반대했다. 그는 후일 병을 핑계되고 지원군 총사령관의 직위를 거부했다.
동북의 오랑캐로 서양의 오랑캐를 무찌른 마오의 전략
한편 동북지역 당-정-군 최고 책임자 가오강은 정치국원 대부분이 참전에 반대의견을 표시하자 그렇게 결정될 것으로 알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참전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대다수의 정치국원들을 집요하고 진지하게 설득했다. 마오가 역설한 중국군 참전 이유 요지는 이렇다.
“스탈린은 인천상륙 작전후 사실상 북한을 포기하고 김일성에게 패잔병들을 동북으로 퇴각하도록 명령했다. 미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올 것이다. 만약 미군이 동북을 침략한다면 소련은 중-소 군사동맹 조약에 근거해 수십만 명의 소련군을 동북에 추가로 진주시킬 것이다. 장춘철도와 뤼순과 다렌항은 여전히 소련이 점거하고 있다.
만약 미군을 패퇴시키더라도 어떻게 그 많은 소련군을 철군시킬 것인가. 동북이 전쟁터로 변하면 전체 중국의 경제건설계획이 파괴되고 민족자산계급과 일부계층이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동북의 미국이나 소련의 영유를 막기 위해서 동북까지 이어지는 전란의 도화선을 미리 끊기 위해서는 북한으로 출병해야만 한다.”
그러자 군사적 열세를 들어 가장 먼저 반대하던 주더가 가장 먼저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사자성어를 외쳤다. 필자는 이때 주더가 말한 입술은 ‘북한’보다는 ‘동북’을 지칭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의 발언 중에 ‘동북’이 전쟁터로 화하면 ‘전체 중국’의 안위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이지, 북한의 안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치국 위원중 최고 연장자인 그의 ‘순망치한’의 외침에 정치국위원들은 박수로서 동의를 표했다.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던 가오강이 그때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북한은 소련이 책임지는데 왜 중국이 끼어들려고 야단인가.’라며 고함을 치며 참전반대의사를 고수했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군의 주력부대는 대부분 동북 출신 제4야전군으로 충당, 소모되었고, 총사령관은 펑더화이가, 병참지원은 가오가 떠맡았다. 기름기로 반질반질한 살찐 돼지 등처럼 윤기 넘치던 동북의 인적, 물적 자원과 마오(毛)의 코털도 마음대로 뽑을 것처럼 막강하던 가오의 권력은 하수구에 물이 빠지듯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급격히 소진되었다. 중국보다 소련의 국익에 부합되는 가오의 친소행각과 동북의 독자세력화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유발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자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켰으나 압록강을 건넌지 한달도 채 못돼 미군의 폭격기에 의해 폭사당했다. 마오가 마오안잉을 참전시킨 내면적 동기는 그 어느 책과 자료에도 찾을 수 없다. 다만 필자는 정치국원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로 동북지역출신의 젊은이들을 인해전술로 사지에 몰아넣게 한 데 대한 마오쩌둥식 솔선수범 내지 자기희생, 노블리스오블리제적 퍼포먼스라고도 분석된다. 마오안잉의 시체는 마오의 명에 의해 북한에 매장되어 있다. 마오안잉의 묘는 중국-북한간의 혈맹의 상징이자(대다수 우리 언론에서는 이렇게만 표현하지만),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요구하는, 썩지 않는 ‘피의 채권’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자국의 초대 주석의 장남의 목숨까지 희생시켜주며 구해준 북한정권이 3대 세습을 하려는데 대하여 극도의 배신감과 경멸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반면 비록 일당독재를 유지하지만 이미 30여년 전부터 세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종신제도 폐지했으며 예측 가능한 임기제와 후계자 양성, 선발제를 순조롭게 실시해오고 있다는데 대해 일종의 체제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마오의 장남을 포함, 20여만 명의 사망자(대부분 동북출신, 만주족이 상당수를 차지)를 낸 한국전에서 중국이 얻은 대가는 무엇인가. 마오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을 축출했고, 동북을 소련과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국의 영토로 확보했다. 즉 동북의 오랑캐로써 서양의 오랑캐를 무찌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거둔 전리품이었다. 그 전리품은 현재 중국 곡물생산량의 70%이상을 생산하는 곡창이자 각종 석유와 석탄 철광이 노다지로 나오는 비옥하고 알찬, 중서부지역 모든 성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황금땅(전 랴오닝 성 당서기의 발언)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그 전리품은 삼황오제의 전설시대로부터 왕국, 제국이나 공화국시절까지를 모두 포괄한 반만년 중국사에서 한족(漢族)이 주체가 된 정권으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중국땅으로 편입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도 채 안 된, 1953년부터.
그래서 우리는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갈파했던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한다.’를 이제는 ‘압록강 북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한다.’고 고쳐 불러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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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의 발 1>
김정일의 방중 동선이 작년 8월에도 이번에도 만리장성 이남을 넘어 베이징에 쉽게 닿지 못하고 동북3성 범위내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까닭은 제16회 ‘실크로 포장한 동북공정’과 제18회 ‘중국 차세대 팽창목표는 북한과 류큐’편 등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뱀의 발 2>
필자는 잘 알려진 것, 많이 논의되어온 것보다는 덜 알려진 것과 잊혀진 것을 사랑합니다. 상술한 내용은 필자가 몇해전 모 일간지에 짤막한 칼럼으로 언급했던 내용을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이 넉넉하게 허용해준 지면을 활용해 더욱 상세하게 기록해 본 것입니다. 강호제현과 선배학자들의 거작과 통설을 조금이라도 보충 보완해보려는 의도이니 아무쪼록 지탄과 질책보다는, ‘아 요런 시각도 있구나’하는 식으로 참조사항 정도로 너그러이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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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2011-05-22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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