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팽창주의 문제

마오쩌둥을 키운건 마르크스 아닌 진시황

Smart Lee 2011. 6. 27. 21:23

마오쩌둥을 키운건 마르크스 아닌 진시황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⑫-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공산주의 경전 자본론을 읽지도 않아…진시황같은 무한팽창주의자

 

                                                                                         강효백 경희대 교수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으레 중국하면 빨간 칠을 해놓고 ‘주의’를 붙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이상적 형태, 이하 ‘공산주의’로 통칭) 중국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런 붉은 중국이 외환보유고, 미국국채보유고, 수출총액, 에너지생산량 등등 각종 (자본주의적) 경제지표에서 세계 1위를 차지, 자본주의 대표국가 미국을 추월하며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니.

옛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 등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체제는 초장에는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급격히 붕괴하는 ‘서든 대스’ 현상을 보여 왔는데, 중국 붕괴론, 중국 분열론, 중국 거품론 등등 서방세계의 저주에 가까운 예상을 깨뜨리며 저 이른바 ‘좌빨 원조 대국 중국’은 좀처럼 죽거나 쪼개지지 않고 마치 빅뱅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한 팽창하고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필자는 감히 원초적 의문을 몇 가지 던져보기로 한다. 중국의 공산주의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속살까지 빨간색일까, 혹시 겉만 빨간색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반만년 생래적 자본주의자 비단 장사 왕서방인 중국인, 그들이 공산주의를 과연 뭐 하는데 쓰는 것으로 알고 있을까? 오늘의 공산중국 초대 황제 마오쩌둥이 동양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마르크스 공산주의 따위의 참의미를 알았을까, 아니 알 필요조차 있었을까? 마오의 필생의 멘토(mento, 인생 길잡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마오는 마르크스를 알았을까?

◇ 청년시절 마오쩌둥. 출처:http://image.baidu.com/
“마오 동지,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손자병법뿐이오.”

이 말은 마오쩌둥이 1935년 1월 대장정 중에 거행된 준의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첫 등극하게 되었을 때, 소련 유학을 갔다온 중국공산당의 이론가 한 사람이 내뱉은 비난의 한마디이다. 그 비난이 시사해주는 바는 매우 크다. 만약 마오가 마르크스를 이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설적으로 말해 그는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잘 몰랐고 중국의 시간(역사)과 공간(지리), 즉 중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국혁명의 최후승리자가 되었다.

비록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해외유학은커녕 대륙을 석권하기까지 단 한 번도 중국땅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중국판 신토불이, 토종 혁명가인 마오가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마르크스의 난해한 이론을 이해하기란, 마치 서양인이 동양고전 <주역>에 녹아든 동양의 우주적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의 심오한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처럼 극도로 어려운, 실제로는 지극히 불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1918년 무렵 베이징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 사서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꿈꾸는 듯한 커다란 눈, 넓은 이마와 단정히 빗은 머리카락, 그리고 감각적인 입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여성과 흡사한 미남청년, 후일 공산 중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청년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후일 마오는 그의 사서시절 베이징 도서관 장서의 절반 이상을 뒤지며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그의 영혼을 흡인시킬 수 있는 책은 주로 수호전, 삼국지연의, 홍루몽, 사기, 한서, 정관정요, 자치통감, 25사, 중국지리와 세계지리 관련서적 등 주로 중국 고전과 역사지리서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 경제무역 회계학 관련 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오쩌둥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하버드 대학 로스 테릴(Ross Terrill) 교수도 그의 저서 에서 마오의 독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오는 독서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드골을 뛰어넘는, 20세기 세계지도자 중 제일의 독서가이자 저술가였다. 특히 역사와 지리방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독서광이었으나 과학기술이나 경제경영, 서구의 정치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포함한 서구의 정치사상서적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마오는 공산주의 경전 <자본론>을 읽지 않았다.

비단 사서시절뿐만 아니라, 마오는 평생 한 번도 마선생(馬先生·중국인이 마르크스를 지칭하는 말)과 마음을 열어놓고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대영제국 의회도서관에서 18년 동안의 장구한 세월을 기울이며 186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펴낸 <자본론 Das Kapital> 원문은 물론, 1872년 러시아판, 20세기 초반에 나온 영문판, 일문판은 커녕 중문본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본론은 기독교인의 성경과 같은 근본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지 않은 자를 참된 기독교도라고 할 수 없듯, 공산주의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론을 본적이 없는 마오쩌둥을 이제껏 동방의 공산주의 수괴로 지칭해왔다.

하도 난해하고 방대해 웬만한 서구의 지식인이 읽기에도 힘든 거작 자본론이 들어올 만큼 당시 중국의 사정은 그렇게 여유작작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국 땅에 자본론 중역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38년 9월 일본세력하의 상하이에서였다.

그것도 궈다리(郭大力)라는 퇴직교사출신이 독문원본이 아닌 영문번역본을 초벌 번역한 것으로 후일 엉터리번역이 많아 1968년에 재번역한 것이다. 오리지널 독문 자본론을 직접 중문으로 완역된 것이 처음으로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본부에 등장한 때는 마오쩌둥 사망 11년 후인 1987년도. 그것마저도 오역 투성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 생활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매우 불우했다. 마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 중의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조악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에서 직접 파견한 고문단이나 소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배우고 돌아온 소련유학파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는 후난 성 출신의 고집 센 촌뜨기로 경멸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합리적 사유와 근대 이성주의의 한계를 초극하지 못하는 독일의 관념주의보다는 진시황을 비롯한 중국의 황제들과 수호전, 손자병법 등 역사소설과 병법서 속에서 그의 혁명이상과 전략전술, 투쟁재료를 찾아내기에 익숙했다. 마오는 또한 일찍이 농민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해 농민을 중국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초기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은 거의 소련 유학파 지식인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중국현실과 중국인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마르크스이론을 주절대는 것에나 능했지 중국의 사회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더구나 중국인의 90%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상황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닮은 카리스마, 통일과 팽창에의 강력한 욕구,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의 진승,오광의 난을 필두로 평등을 혁명이념으로 내걸며 중국의 시공을 수놓은 무수한 농민봉기들, 성공한 혁명사와 실패한 반란사와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역사 지리적 인식, 묵가사상(평등을 주창하여 오늘날의 민주사회주의와 유사), 도가사상(무정부주의, 자급자족적 이상사회 추구)을 위시한 중국의 제자백가사상 그리고 마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같은 박학다식과 상식이 혼합된 종합체와 중국의 후진 농업환경의 교차지점에서 마오의 능력은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빛나게 되었다.

◇ *진시황의 통일 진나라의 최대 판도, 마오쩌둥이 팽창시킨 현대 중국의 판도는 진시황 시절 비해 4배가량 넓다. 진시황 통일이전의 진나라와 마오의 초기 공산정권 근거지는 오늘날 싼시(陝西)성 부근에 해당되어 서로 겹친다. 출처: 필자가 1990년대 중반 상하이에서 수집, 소장중인 CD롬 자료.

마오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무한팽창주의자

1949년 10월 1일, 만 56세의 마오쩌둥은 그의 서재를 나왔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을 선포하고 국기게양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안지에(長安街)는 인파로 가득 찼다. 마오쩌둥이 탄 전용차량앞에는 탱크 한 대가 길을 열고 있었다.

미제 샤먼 탱크, 일련번호 237438W14. 디트로이트에서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항에 상륙한 그 탱크는 마오쩌둥 섬멸을 지원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샤먼 237438W14는 ‘자유세계’에서 한 시절을 보냈으나, 이제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텐안먼 광장 앞으로 이어지는 창안지에를 통하여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마오쩌둥은 텐안먼 망루에 올라 외쳤다. “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은 이미 일어섰다. 중화민족은 모욕을 받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로 시작되는 건국 기념사와 국기게양식 축사에서 마오는 단 한 마디도 ‘주의(ism)’나 ‘외국인’을 거론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그 날의 키워드는 중국, 역사, 지리, 국가, 민족 등이었다.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손문이 열었던 푸른 하늘은 감빛 노을로 붉게 물들고 손문이 가리켰던 하얀 태양은 금빛 찬란한 다섯 개의 별로 바뀌었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의식이자 공산 황제의 등극식을 거행하던 날 수많은 중국의 평민백성들의 뇌리에는 무엇이 되살아나고 있었을까?

오랜 과거의 추억이 가까운 과거의 기억보다 오히려 생생하게 떠오르는 노인들처럼 중국인들의 뇌리에는 역사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수한 영웅호걸들의 영상들이 오버랩되며 파노라마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특히 마오의 청년기와 정강산(井岡山)시절의 멘토였던 수호전 양산박의 108영웅들을 이어, 대장정 시기의 멘토였던 명말 유적집단의 총두목 이자성(李自成)이 화면을 반쯤 매운 모습으로 등장했다.(졸저, <협객의 칼 끝에 천하가 춤춘다>, <협객의 나라 중국> 참조 바람)

그런데 파노라마의 맨 끝 부분, 이전의 모든 출연자들을 깡그리 압도할만한 거대한 형상의 캐릭터 하나가 화면을 독점하더니 정지화면으로 고정되었다. 그는 바로 진시황(BC259-BC210). 1936년 공산당통치거점 엔안(延安)시절 이후 1976.9.9 베이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의 마오쩌둥의 최대, 최고, 최후, 궁극적 멘토인 진시황이었다.

마오쩌둥의 커밍아웃, ‘나 역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이다. 나 역시 진시황이다(我也是秦始皇). 린뱌오는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다. 중국 역사는 두 개 파로 나뉜다. 하나는 친 진시황파, 다른 하나는 반 진시황파.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나 공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은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고 문자를 통일했고 사통팔달의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나라 속에 나라를 조장하는 지방분권제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중앙에서 임기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토호세력의 세습제를 철폐하였다.”

이는 80세의 마오쩌둥이 1973년 9월 23일, 이집트 부통령 후세인 알 사페이(Hussein Al-Shafei)를 접견한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이다. 참으로 경악스러운 ‘고백’이자 ‘커밍아웃’이었다. 특히 마오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토종 공산주의자정도로 옹호해왔던 골수 친소파와 극좌파들에게는 초대주석의 봉건황제적 정치지향과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벼락같은 ‘배신의 피날레’였다.

마오쩌둥의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1949년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다르다. 신중국 건국 이전 마오는 진승, 오광, 이자성, 홍수전 등 중국사의 농민봉기 지도자들에 대한 어록을 많이 남겼으나 진시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회피하였고 간혹 거론하더라도 분서갱유 등 부정적 측면만을 유독 강조하였다. 당시 진보적 사상으로 치부되었던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지도사상으로 하여 조직된 중국공산당, 당 주석이 어찌 함부로 봉건황제를 찬양할 수 있겠는가. 제 아무리 당주석이라 하더라도 반당 반혁명분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우행으로 판단했으리라.

마오쩌둥은 진시황 천하통일 이전의 진나라 판도에 속한 싼시성 일대를 장기점거하면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는 혁명과도기(1936-1949년)에, 아주 자연스럽게 진시황을 자신의 멘토로 ‘내밀히’ 삼았다. 정강산과 대장정시절에 각각 공개적으로 수호전 108영웅과 이자성을 ‘공개적’으로 멘토로 삼은 것과는 달리.

혁명과도기에 마오는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무한팽창정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마오 자신의 가치체계로 소화한, 이른바 진시황의 내면화(internalization)를 이루었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이후부터 진시황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공개 발언을 시작하였다. 진시황에 관한 마오의 수많은 발언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마오의 제8기 당중앙회의 2차회의시 (1958년 5월 8일-18일) 어록 한두 구절만 더 들기로 한다.

“진시황은 현실을 중시하여 구습을 혁파하는 일의 전문가였다. (이때 린뱌오가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저질렀다’라며 마오의 발언을 끊고 들어왔다. 잠시 침묵 후) 나 역시 진시황을 인용하는 것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쯤이야 나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진시황은 겨우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 6천명의 유생을 생매장했다. 우리가 혁명을 하면서 무수한 반혁명지식인들을 죽이지 않았나? 언젠가 한 민주파 인사와 논쟁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진시황이라고 욕한다. 그렇다. 나는 진시황이 아니라고 한 번도 부인한적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비난은 너무 부족하다. 더욱 심한 욕설을 해다오, 나 마오쩌둥은 진시황보다 백배 심한 독재자라고.”

“‘공산주의’, ‘제국주의’등 현재 우리가 밥 먹듯이 쓰고 있는 상용어는 원래 소련이나 미국 영국 등지에서 나온 외래어를 중문으로 번역한 것들이다. 중국인과 외국인이 이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완전히 다르다. 진시황이후 중국인은 외국인을 눈 안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엽부터 영국과 소련 등 제국주의세력의 침입으로 중국인은 노예가 되어 버렸다. 과거의 오만이 지금은 굴종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당내에는 외래품이라면 막무가내로 숭배하는 풍조가 있다. 공산주의, 제국주의 따위의 함의도 알지 못하면서 외래용어들을 아는 채 하는 폐습은 반드시 교정하여야 한다.”

위의 마오의 첫 어록에서 알 수 있듯 마오는 진시황의 정체성을 마오 자신의 정체성에 융합시키는 동일시(identification)현상을 노출하고 있다. 급기야는 제2의 분서갱유, 즉 10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2천만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살생부에 생(生)으로 표시된 자 빼놓고는 모두가 타도되었다.

자신을 영원한 붉은 태양(紅太陽)으로 부르도록 우상숭배를 음양으로 강요하였다. 죽음을 3년 앞둔 시점 마오 자신 스스로 ‘나 역시 진시황이다.’라는 나쁘게 말하면 심각한 착란현상에 빠지고, 좋게 말하면 ‘만년(晩年)의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된다. 또한 위에 제시한 두 번째 어록에서 마오가 ‘공산주의’를 서양에서 건너온 ‘외래품’의 일종으로 간주할 정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의외이다.

◇ 중국의 ‘영해’라고 홍갈색으로 표시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 국제해양법에 저촉되며 최근 베트남 등 주변 동남아 국가들과 심각한 국제분쟁이 발생하고 있거나 분쟁이 우려되는 해역. 출처: < 中國國家地理 > 2010.10. 總600卷, 中國海洋 特輯珍藏版, 속지에서 스캔.

마오쩌둥의 중국은 진시황 시절 영토의 4배 팽창

천하통일과 팽창정책 면에서 진시황과 마오쩌둥의 업적을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통일 전에 진시황은 진나라의 국왕이었다. 당시 천하는 7개국으로 분할 웅거하고 있었다. 진나라 하나로 보면 최강이었지만 나머지 6국의 국력을 합친 종합국력으로 보면 진나라는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6국은 역시 6국, 느슨한 동맹체제하의 개별 국가의 국력은 분산되는 법이라서 결국 6국은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국공내전시 중국에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맞서고 있었다. 당시의 국민당은 중국의 최고 부유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공산당은 진시황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였던 서북방의 황토고원 일대만 점거하고 있었다. 진나라처럼 초기의 마오쩌둥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갈수록 창대하여졌다. 전국시대 6국과 흡사하게 국민당은 겉보기에는 풍만한 한 몸이었으나 실제로는 각지에 할거하는 군벌들이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로 찌들어 흩어진 모래와 같았다. 최후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대륙을 석권했으며 천하를 탈취했다.

진시황은 황제로 등극한 후 도로를 건설하고 만리장성을 연결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정벌하고 남으로는 지금의 장쑤성과 저장성 일대를 점거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일시 진출하는 등 혁혁한 영토팽창업적을 거두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난 ‘청출어람’이라 할까. 마오쩌둥은 영토확장면에서 그의 멘토 진시황을 훨씬 능가했다. 동북으로는 6.25를 기화로 소련세력을 물리쳐서 한족이 주체가 된 정권이 단 한 시도 점유한 적이 없었던 저 광활하고 비옥한 만주를 차지하였다. 북방의 강 가운데 조그만 섬 하나를 놓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격렬한 지상전도 불사하였다.

서남으로는 평균 해발 4900미터 호흡곤란과 만년설 지대 티벳을 점령하는 것도 성에 안 찼던지,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산맥보다 훨씬 더 높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북부까지 찍어 누르는 ‘미친 팽창’ 야욕을 마음껏 능력껏 발산했다. 마오쩌둥은 진시황 시절의 판도를 4배 이상 확장하는 휘황찬란한 위업을 거두었다. 끝으로 한 가지, 필자의 눈조리개를 쫙 펼치게 하는 사건- 1974년 1월 중국은 돌연 남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월맹)의 서사(西沙·Paracels) 군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편입시킨 이른바 ‘중국의 서사군도 점령사건’을 돌아보기로 한다.

이 사건발생 2년 전에 있은 중일수교시에 일본측에서는 중국측이 행여 돌려 달라 할까보아 노심초사하였던 센카쿠 열도를 비롯한 류큐 군도와 주변 해역 문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마오가 아니었던가. 마오쩌둥의 대외전략 기조는 군사력을 앞세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무한 팽창주의였으나 어디까지나 산악과 평야, 사막과 고원지대 등 뭍(육지)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남의 나라, 그것도 같은 공산국가의 섬들까지 냉큼 집어 삼키기 시작했으니, 이는 두루뭉수리 넘어가서는 안 될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진시황을 비롯한 대부분의 황제들처럼 뭍만 무한정 탐하던 마오의 식성이 말년에 이르자 걸신들린 것처럼 ‘물뭍’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으로 변했는지, 필자는 그 내막을 써레질 하듯 살펴보았다.

아 그런데, 키 작은 부도옹 하나가 오뚝, 무논의 찰진 흙덩이처럼 걸려드는 게 아닌가!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서사군도 침략의 주도자는 덩샤오핑이었다. 당시 덩은 2번째 사면 복권되어 부총리직을 맡아 막장의 끝물에 이른 문화대혁명 정국을 잠시 장악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서사군도의 침략은 후일 남사군도 침략, 센카쿠 및 류큐 군도 반환요구 등으로 이어지는, 즉 중국이 대륙확장에서 해양진출로 팽창의 방향을 돌리는 일대 전조였다. <다음회에 계속>

<참고자료>

강효백, <협객의 칼 끝에 천하가 춤춘다>. 한길사 1995.
강효백, <차이니즈 나이트 Ⅱ>, 한길사, 2000.
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 한길사, 2002.
Ross Terrill, Mao: A Biography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中國國家地理 > 2010.10. 總600卷, 中國海洋 特輯珍藏版,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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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2011-06-18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