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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결단의 순간(1) |
"인생은 선택이다"는 말이 있다. 신앙 역시 선택이다. 신앙이 선택인 점에 대하여 인류 역사에 등장한 천재 중의 한 사람인 파스칼이 말하였다. "신앙은 선택이다. 도박사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든 화투장에 자신의 전 재산을 걸듯이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바에 이승과 저승 전체를 건다"
우리는 살아가는 세월 동안에 갈림길에 서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를 고민하며 선택하여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어떤 길을 선택하였는지에 따라 삶 전체가 바뀐다. 지금 나는 72세이다. 나 역시 선택하고 고민하며 오늘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그동안에 내가 만났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결단하였던 세월을 헤아려 보노라면 스스로 감격에 젖어들게 된다. '그런 갈림길들을 거치며 용하게도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구나'하는 감동에 젖어들게 된다.
나는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전공하였기에 남달리 고민도 깊었고, 고민이 깊었기에 선택의 갈등도 더 심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는 중에 동서양의 여러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살피는 중에 내 마음에 특별히 와 닿는 철학자가 있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eren Kierkegaard, 1813~1855)이다. 그는 불과 42세에 죽은 철학자였지만 깊은 사상세계를 탐구하여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의 주제를 일컬어 "어떻게 하면 진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의 질문이라 하였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나서 자라면서 "어떻게 하면 진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늘 고민하여 오던 터이었기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마음에 깊이 닿았다. 그래서 그의 책이라면 골고루 읽으며 그의 생각의 깊이를 내 것으로 삼으려 힘썼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활약하였던 다른 인물이 있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Grundtvig, 1783~1872)목사이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처럼 코펜하겐대학을 졸업하고는 덴마크 땅에 여하히 교회다운 교회를 세울 것인가? 덴마크 나라를 여하히 좋은 나라로 건설하여 갈 것인가?에 자신을 걸었던 사람이다. 신앙운동과 애국운동을 한 마음 한 가슴에 품고 일생을 걸었던 사람이다. 나는 철학과 상급반에 오르게 되는 즈음에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순수철학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그룬트비 목사와 같이 국민교육과 개혁운동에 헌신하는 실천가로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내 인생 결단의 순간(2)
철학과를 다니던 대학 상급반 시절 나는 두 가지 길을 놓고 어느 길로 나갈 것인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 덴마크에서 순수철학자로 살았던 키에르케고르의 길과 국민교육과 사회개혁에 헌신하였던 그룬트비 목사의 길을 놓고 고민하였다.
그런 고민이 깊어가던 어느 날 나는 연구실에서 두툼한 철학서적 20여 권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생각하였다. '이 책들 속에서 내 남은 삶을 신바람 나게, 보람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할 내용들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한국 철학계는 거의 번역철학이었다. 교수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학생들에게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칸트를 소개하고 럿셀을 소개하고 하이덱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상과, 자신의 신념을 학생들에게 나누지를 못하고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일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선배 교수님들처럼 '그렇게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갈등이 일었다. 그런 고민의 날들을 보낸 끝에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길이 아니라 그룬트비의 길을 가기로 선택하였다.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기로 결단하였다. 사회와 교회의 한 모퉁이를 밝히고 개혁하는 일에 내 삶을 투자하는 실천가가 되기를 선택하였다.
당시에 나는 철학을 공부하러 미국유학을 가기 위하여 수속 중이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로 살기로 선택하였기에 유학의 길을 접고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2학년이던 학생시절에 보다 철저한 실천가가 되기 위하여 청계천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내 인생 결단의 순간(3)
장로회신학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때다. 이왕지사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읽는 중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말이 거듭거듭 나오는 것을 읽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목회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1971년 여름방학을 맞으면서 서울시에서 어느 곳에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지를 조사한 결과 청계천 하류 송정동에 1,600여 세대가 빈민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현장을 찾게 되었다. 그들의 처지가 한국에서는 가장 가난한 분들로 여겨졌다. 그곳으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신학교 동료들에게 그런 뜻을 밝혔더니 동료들이 한결같이 만류하는 것이었다.
"김진홍 전도사 그렇게 무모하게 덤벼들지 말어. 꼭 빈민촌으로 들어가려거든 큰 교회의 재정지원이나 크리스천 기업가들의 지원을 확보한 후에 들어가야지 그렇게 의욕만 앞세워 빈손으로 들어갔다가는 결국은 실패하고 나오게 될 것이야"
나는 동료들의 그런 염려의 말을 듣고는 며칠 동안 기도하며 생각하였다. 그렇게 재정지원의 약속을 받아놓고 빈민촌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냥 들어가 열심히 일하면 주인 되신 예수님이 뒷바라지를 다 해 주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며칠간 하던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때의 결단이 지금 나로 하여금 행복한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나는 그의 머슴일 따름이다. 머슴은 주인의 뜻을 받들어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만 하면 될 것이다. 일터에서 먹을 것, 입을 것들은 주인이 모두 알아서 뒷바라지 해 주시는 거다. 나는 머슴이니 머슴답게 그냥 빈민촌으로 들어가 죽기로 각오하고 일만 하자 그러면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책임을 져주실 것이다"
그런 결단으로 빈민촌으로 들어간 지 어언 42년 세월이 지났다. 지난 42년을 돌이켜 보면 내가 생각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예수님이 채워 주셨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고 행복하다.
(2013-06-27/29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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