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산상수훈과 8복

Smart Lee 2013. 11. 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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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과 8복(1)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에서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 한다. 예수께서 산에서 베푸신 가르침이어서 산상수훈이라 부른다. 산상수훈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진수가 담겨져 있기에 천국헌법이라 일컫기도 한다. 한국에는 한국헌법이 있고 미국에는 미국헌법이 있듯이 천국에도 헌법이 있을 것이다. 천국에 헌법이 있다면 산상수훈이 천국의 헌법이 될 것이란 뜻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런 말은 산상수훈의 내용이 그만큼 값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은 힌두교 신도이면서도 성경의 산상수훈을 높이 평가하면서 다음같이 말하였다.

"산상수훈에 담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종교중의 종교이요 경전중의 경전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경전 중에서 최고의 금자탑이다"

 

간디의 이 말을 들은 한 서양 선교사가 간디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힌두교 신도이신데 산상수훈을 그렇게 높이십니다. 선생님, 힌두교 신도들이 산상수훈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선교사의 이 질문에 간디가 다음같이 답하였다.

"장미처럼 하십시오. 사람들이 장미를 왜 좋아합니까? 높은 향기 때문이지요.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수훈을 몸으로 살고 향기를 발하면 힌두교 신도들도, 불교 신도들도 산상수훈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간디의 이 대답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크리스천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대답이다. 신약성경중의 고린도후서에는 크리스천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면서 다음같이 일러 준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장 15절)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된다면 이 세상이 훨씬 더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산상수훈과 8복(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1~3절)

 

산상수훈은 먼저 여덟 가지 복으로 시작된다. 여덟 가지 복중에 첫 번째 복은 비우는 복이요, 두 번째는 채우는 복이다. 먼저 비우고 나서 그 빈자리에 채우는 것이다. 이들 여덟 가지 복을 차례로 살펴보기 전에 ‘복’이란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복’을 일러 주실 때에 생각하셨던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까지 복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복의 교과서’라 함직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일러주는 ‘복’, 곧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문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에는 4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다. 하나님이 복이시기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 자체가 복이 된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다음같이 일러 준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디모데전서 1장 11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복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체가 복을 누리는 삶이다.

 

둘째는 영어로 ‘Blessing’ 바로 축복이란 말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피 흘려 바치는 것 또한 ‘Blessing’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복은 나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피 흘려서까지 바치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한다. 무언가를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이 일러주는 ‘복’은 피 흘려서까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복’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다음같이 일러 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산제사란 살아 있는 제물을 일컫는다. 우리들의 날마다의 삶이 ‘살아있는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복’이다.

 

산상수훈과 8복(3)

 

 

성경은 복의 교과서라 할 만큼 복에 대한 가르침이 많다. 복에 대한 그런 가르침 중 산상수훈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핵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복’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이해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글에서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기에 하나님을 알고 믿고 모시는 자체가 복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에 피 흘리는 수준에까지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복이라 하였다.

 

오늘은 복에 대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의미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복이 있도다’하실 때의 언급한 복의 의미는 받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베푸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복이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다. 크리스천이 누리는 복은 무엇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베풀고 나누는 데서 오는 복이다.

 

주는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한 실 예가 있다. 미국의 John. D. Rockefeller의 경우이다. 그는 20대에 기업을 일으켜 33세에 미국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43세 때에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53세 때에 병들어 잠을 못자고 먹지를 못하여 하루에 고작 우유 한 잔에 비스킷 몇 조각 먹을 정도였다.

 

그의 병이 위중한 것이 소문이 나서 뉴욕의 한 신문은 "Rockefeller 사망하다"는 기사를 써둔체 그의 죽음을 기다릴 정도였다. 그는 머리카락이 다 빠져 안전히 문어머리처럼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과 응접실을 오가다가 응접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성경을 들었다. 그가 성경을 펼쳐 읽은 순간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장 38절)

이 말씀을 읽는 순간 그에게 한 깨달음이 왔다. “아하 나는 평생토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모으는 일에 열중하여 왔지 주는 일에 너무나 인색하였구나! 이제나마 주는 일에 나서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날로 "Rockefeller Foundation"을 설립하여 나누고 베푸는 일에 전심을 기울였다. 그 뒤로 건강이 날로 좋아져 98세까지 건강을 누리며 살았다. 주는 자가 누리는 복이 어떠한지를 록펠러의 경우가 일러 준다.

 

산상수훈과 8복(4)

 

 

예수께서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여덟 가지 복을 이르셨다. 예수께서 일러주신 ‘복’이란 말에는 4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앞의 3가지 의미는 지난 글에서 살핀 바이니, 오늘은 네 번째 의미를 살펴보자.

 

네 번째 복이 가장 중요하다.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오아시스"를 뜻한다.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의 오아시스”는 바로 삭막한 세상살이에서 생명과 희망의 물이 솟아오르는 영혼의 오아시스를 상징한다.

 

하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 우리들의 영혼에 전하여지는 생명의 물에 대하여 예수께서 친히 일러 주신 말씀이 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 나눈 대화중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

 

예수께서 일러 주시는 ‘복’은 바로 이런 ‘복’이다. 우리들의 영혼 안에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복’이다. 그런 은혜의 경지를 누리는 ‘복’이 예수께서 일러 주시는 ‘복’이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58장에서 이와 짝을 이루는 말씀이 나온다.

"나 여호와가 항상 너를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장 11절)

 

여름 가뭄에 논과 밭이 타들어 갈 때면 농사꾼들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소낙비가 쏟아져 마른 땅에 물이 흘러들면 온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솟아오른다. 그런 모습이 바로 "물댄 동산"이다. 그리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은 ‘복’이 예수께서 일러 주시는 ‘복’이다.

 

산상수훈과 8복(5)

 

 

"MAKARIOI,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장 4절)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첫머리에서 일러 주신 여덟 가지 복의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이다. 이 부분을 평지수훈이라 일컫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라"(누가복음 6장 21절)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애통한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그냥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뼈가 저리도록 아픔을 느끼는 상태를 일컫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느끼는 그런 애통이다.



무엇을 왜 애통하는가?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내가 하여야 할 일은 하지를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찾아서 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통이다. 못난 짓을 골라서 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좌절, 그런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



이런 애통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실감나게 언급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4절)

이 말씀에서 ‘곤고한 사람’은 파선 당하여 갯벌에 주저앉은 배를 가리킨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갯벌에 꼴아 박혀 있듯이, 실패한 인생이 되어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하는 애통이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도 바울이 위의 글을 쓴 시기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쓴 글이 아니고 초신자 시절에 쓴 글도 아니다. 로마서는 그의 말년에 쓴 글이다. 그때는 능력을 행하며 숱한 교회를 세우며 영적 거장 바울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 쓴 글이다. 그런 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자신에 대한 탄식을 하고 있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들의 신앙여정에도 불현듯 밤이 오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를 접하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깊이이다.

사도 바울이 위의 글에서 멈추고 말았더라면 그의 삶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애통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다음 같이 감사의 말로 다시 시작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장 25절)

바울이나 우리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 때에는 애통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지만, 고개를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구원의 감격, 감사를 드리게 된다.

 

산상수훈과 8복(6)

 

 

“MAKARIOI, 복 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 4절)



예수께서 일러 주신 여덟 가지 복의 세 번째는 온유한 자들이 누리는 복이다. 온유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부드러움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의 온유란 말에는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에서의 온유에는 세 가지 온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이다.
셋째는 타인에 대한 온유이다.



첫 번째의 하나님의 온유에 대하여 살펴보자.

어떤 실패, 어떤 고난, 어떤 좌절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굳게 세워 나가는 마음이다. 구약성경의 욥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으나, 갑자기 사업이 부도나고 건물이 무너져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피부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함이 없이 다음같이 고백하였다.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욥기 1장 21절)



두 번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화가 나서 앙갚음하고 싶고 그럴 능력도 있지만 꿋꿋이 참는 마음이다.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하여 오히려 상대를 포용하여 주는 정신력, 그런 내공(內攻)이다.



세 번째의 타인에 대한 온유는 어떤 온유인가?

타인에 대한 온유는 관용과 포용과 통한다. 용서할 수 없는 자임에도 오히려 포용하고 기회를 주어 선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는 마음이다. 우리 사회에 꼭 있어야 할 마음이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하셨다. 우리 모두가 예수로부터 온유를 배워, 위로받고 쉼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산상수훈과 8복(7)

 

 

"복 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마태복음 5장 6절)

 

예수께서 일러 주신 여덟 가지 복의 4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 대한 복이다. 이 말씀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의로운 자"가 아니란 점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 하셨으면 우리들 같이 별로 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누릴 수 없을 것인데, 감사하게도 “의로운 자”라 하지 않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70년대에 김지하 시인이 쓴 시중에 "타는 목마름으로"란 제목의 시가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다. 타는 목마름으로 의로워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으로는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마음이 약하고, 육신이 약하고, 처지가 그렇지를 못하여 의롭게 살지를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다.

 

고맙게도 예수께서는 의로워지기를 갈망하면서도 의롭게 되지를 못하여 늘 의로워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하셨다. 그런 사람들이 언젠가는 넉넉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바가 있다. “의롭다”는 말의 의미이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일컫는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란 말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도덕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에 타는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4)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 같은 영적 대가도 의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자신을 탄식하였다. 바울이 그러하였거늘 우리들 같은 범인들이야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의롭지 못할지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의로워지기를 사모하고 갈구한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게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산상수훈과 8복(7)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여.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 7절)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첫머리에서 일러 주신 여덟 가지 복의 다섯 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누릴 복”이다. '긍휼하다'는 말은 ‘자비하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비’란 말보다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닌 말이다. 성경에서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여 주는 말이다. 긍휼이란 말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마음이다.



동양에서 긍휼과 비슷한 말이 "측은지심"이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종교의 근본이 측은지심이라 하였다. 공자는 종교의 근본이 측은지심이라 하면서 측은지심을 설명하기를 어린 아이가 위험한 우물에 빠졌는데,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로 들어가 아이를 구해내는 행동을 측은지심이라 하였다.



우리들 각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긍휼이요, 자비하심의 극치요 측은지심이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31장에서 긍휼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일러 준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리하여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1장 20절)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창자가 들끓는다"는 말은 단장의 고통 즉 창자가 꼬일 때에 느끼는 극심한 고통을 일컫는다. 그리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긍휼히 여긴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생각할 때에 단장의 고통과 같은 지극한 아픔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사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사가 나온다. 무리를 불쌍히,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마가복음 6장 34절)



재난에 처한 이웃을 향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측은지심을 지니는 사람, 그들과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복을 베푸신다.

 

(2013-09-04/18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