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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삶의 고수를 찾아서

Smart Lee 2008. 1. 12. 04:04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는 

<수호지> 양산박의 리더  송강 

 

 

창조적인 삶의 고수를 찾아서 

카피라이터(copywriter).
“캐치프레이즈?슬로건?설명 문장 등 광고문안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이 단어는 약 4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없었던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카피라이터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카피라이터 생활을 했던 인물이 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으로 이어지는 

‘국민 CM송’ 작사가로 유명한 이만재 카피파워 대표.

“지난 30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한 적이 하루도 없었으니
카피라이터는 축복받은 직업임에 분명하다”고
당당하게 밝힌 그는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내 이름이 이만재(李萬才)이다. 참으로 허풍스런 이름이다.
사실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름을 바꾸셨는데,
전말은 이렇다. 내가 4세 때 천자문을 떼자
동네에선 신동이 나왔다고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신의 머리만 믿고
신세를 망칠까 염려해 급히 개명(改名)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장한 뒤 아버지께 그 연유를 묻자 이렇게 답해 주셨다.

‘이 세상에는 우(愚), 달(達), 모(謨), 지(智), 재(才)라는
5등급의 인간유형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성적표의 수, 우, 미, 양, 가에 비유할 수 있다.
이름에 재주 재(才)를 넣은 것은
네가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한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란다
.
그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들에게
최하 등급의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 신춘호 농심 회장의 ‘허허실실’ 4대 전략

이 대표 부친의 설명에 따르면,
-‘’에 해당하는 재주 믿고 사는 사람,
예능으로 사는 사람 이다.

-다음으로 ‘’에 해당하는 것이 지혜 지(智)이다.
속된 말로 ‘가방 끈이 긴’ 사람 이다.

-다시 그 위의 ‘’에 해당하는 등급에는 꾀 모(謨)가 있다.
머리를 써서 사람을 잘 부리는 경영자,
기업가, 상인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한 단계 높은 ‘’ 등급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버지는 통달할 달(達)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 모든 분야에는
통달의 경지에 이른 고수(高手)가 있는데,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고 하셨다.
그래서 학벌이나 직책 등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어리석을 우(愚)
’에 해당하는 최고 등급을 차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말이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킬 줄 아는 사람,
사랑이나 대의를 위해서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
어리석어야 할 때 어리석을 줄 아는 사람,
져줘야 할 때 져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위대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하셨다.”

그러면서 이 대표 부친은
수호지의 사례를 들었다고 한다.
양산박에는 중원천하를 주름잡던
108명의 영웅호걸이 집결했다.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
절간의 우람한 기둥을 쓰러뜨린 노지심,
쌍도끼만 들었다 하면 일당백을 하는 흑선풍,
비둘기의 왼쪽 눈까지 맞출 정도의 활 실력을 갖춘 화영….
그러나 정작 이들을 지휘한 리더는 따로 있었다.

양산박의 영웅호걸을 이끌었던 리더는
가장 완력이 세거나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 역할은 가장 키가 작고,
못 생기고,
얼굴이 시커멓고,
아무 재산도 없는 사람,
송강
맡게 되었다.

변방의 말단 관리 출신에 불과한 송강 이었지만,
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는 능력
이 바로 그것이었다.

송강은 전쟁을 하다가 버선발로 적군 앞에 뛰어나가
엎드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 왔던 ‘적장’이 감복해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는 ‘심복’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우정과 사랑과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사람 이었기에
송강은 양산박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대표는 “그러나 과연 우리가
‘우(愚)’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 뒤
“나로서는 그것까지는 감히 꿈을 꾸지 못하겠다.
다만 ‘우’ 혹은 ‘달(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역할에 만족할 뿐”이라고 자답했다.

그는 고(故) 한창기 사장,
임권택 영화감독,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등 4명을
창조적인 삶의 고수(高手)’로 꼽았다.

지면관계상 여기선 한 사람의 사연만 소개한다.
“내가 1986년 신춘호 회장과 독대하게 된 것은
새우깡 때문이었다.
당시 판매 동향이 주춤하고 있던 새우깡을
회생시켜야 한다는 임무가 떨어졌다.

신제품 개발과 광고 제작은 반드시 챙긴다는
신 회장이 나에게 몇 가지 주문을 했다.

첫째, 다른 과자 광고는 절대 흉내 내지 말 것(농심은 농심이어야 한다).
둘째, 세련된 광고는 만들지 말 것(멋 부리지 마라).
셋째, 절대 잘난 척 하지 말 것(첨단시설, 자동생산, 완벽위생 등 용어 쓰지 마라).
넷째, 유머감각을 살릴 것(자연스러워야 한다).
고수의 지침을 들으면서 ‘허허실실’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이만재 작사, 윤형주 작곡의 새우깡 CM송은
그런 과정을 통해 나왔다.
시장 반응은 엄청났고,
신 회장과 나는 곧바로 신(辛) 라면 런칭 광고 제작에 돌입했다.”

이 대표는 직업상 많은 인사들을 인터뷰한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대략 2백명을 만났는데,
주로 문화예술계의 저명인사나
기업집단의 경영자들이었다.

그가 만나온 두 집단 사람들의 영역은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향이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집단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집단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목격된 것은 3가지 였는데,
-바로 독립심,
-호기심,
-창의성이었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창조적인 삶을 개척한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3가지의 본능적인 습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3가지 습관 을 ‘3W 법칙’ 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1)Why?
(2)Why not?
(3)Why must I do so?
라고
자신에게 묻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상징적 사례 하나가 있다.
한 자동차광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부인이 꺼내든 손거울을 통해
자동차 뒤쪽 풍경을 얼핏 보게 됐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오른 그 남자는
부인의 손거울 을 운전석 옆에다 붙들어 매었다.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 가장 참신한 발명품으로
평가되는 ‘백미러’는 그렇게 탄생했다.”

** 역대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장수비결

그러면서 이 대표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3W 법칙’을 상기시킴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시골 목장에서 있었던
실화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호기심과 관찰력이
어떻게 발명품을 탄생시켰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이 어린 목동이 어느 날 목책 우리 안에
갇혀 있던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양들은 답답함을 느꼈는지
울타리를 따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빈틈을 찾아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울타리를 따라서 돌던 양들이 어느 지점에만 이르면
몸을 움찔하며 피해 가는 장면이 목동에게 포착됐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무심히 넘겼을 수도 있었지만
이 목동은 ‘Why?’하고 의문을 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들장미 가시넝쿨 이 있었고,
양들이 가시에 찔릴까봐 그곳을
피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은
철사 토막으로 가시넝쿨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철조망이었다.
영리한 소년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 철조망으로 특허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특허를 획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군부대들이 병영의 안과 밖을 나누는
울타리를 치기 위해서 철조망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토 보호에
민감해진 유럽 국가들이 국경 수호 차원에서 철조망을 쳤다.
3W 법칙이 우리의 일상에 언제든지 적용될 수 있음을
웅변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 동안
직업별 평균수명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79세의 종교인이 장수 1위 차지했다고 한다.
아마도 욕망을 비우고 편하게 사니까 그런 것 같다.

그 뒤를 정치인(73세),
교수(72세),
행정관료(71세),
법조인(70세)이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백수로 지낸 남성(60.7세)의 평균수명이
취업한 남성보다 14.4년이나 짧았다는 사실이다.
놀고 지내는 것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머리를 많이 쓰는 과학자는 일반인보다
5~10년 더 장수한다는 기록도 있다.

역대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동시대인의
평균수명보다 훨씬 길었다는 결과가 그 증거로 제시됐다.
3W 법칙을 실천하며 창의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건강과 장수의 비결
인 셈이다.”

감상 하나 덧붙인다. 이 대표는 앞에서
“‘우(愚)’ 혹은 ‘달(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역할에 만족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재(才)’로 인식해온
그야말로 이미 ‘우’ 혹은 ‘달’의 경지에 오른 셈이 아닐까.

 

(본글은 인간개발연구원의 강연에서 퍼온 글)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참고자료                                                     

 

수호전(水滸傳)

    중국 명대(明代)의 장편무협 소설. 원말 명초(元末明初)의 시내암(施耐庵)이 쓰고, 나관중(羅貫中)이 손질한 것으로 4대 기서(奇書) 중의 하나이다. 수령인 송강(宋江)을 중심으로 108명의 유협(遊俠)들이 양산(梁山:山東省 壽張縣 남동) 산록 호숫가에 산채를 만들어 양산박(梁山泊)이라 일컬었으며, 조정의 부패를 통탄하고 관료의 비행에 반항하여 민중의 갈채를 받는 이야기이다.

   창조된 인물들의 이미지와 묘사된 성격이 매우 다채로우며, 《서유기(西遊記)》가 신마(神魔)를, 《유림외사(儒林外史)》가 지식계층을, 《홍루몽(紅樓夢)》이 명문의 자녀를 묘사한 것과는 달리 《수호지》에서는 노지심(魯智深)·이규(李逵)·무송(武松) 등과 같은 신분이 낮은 정의한이나, 임충(林?·양지(楊志)·송강 등과 같은 지주 출신자 또는 봉건정권을 섬긴 적이 있는 활발하고 용감한 사나이들이 중심인물이다. 필치는 거칠지만, 풍부한 색채와 어휘, 발랄한 표현으로 계급과 유형이 상이한 인물들을 그려내고, 이들 인물의 생활발전을 통하여 봉건통치 집단의 암흑성과 서민의 비참한 생활, 용감한 투쟁 사상·감정 등을 나타내었다.


   송강은 실제 인물이며, l121년 회남(淮南)에서 농민반란을 일으켜 35명의 부하를 이끌고 한때 상당한 기세를 올렸으나, 그 후 항복한 사실이 《송사(宋史)》에 기록되어 있다. 남송으로부터 원대(元代)에 걸쳐, 이야깃거리로 흔히 채택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호걸들 중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노지심(魯智深)·이규(李逵)와 같은 분방한 야인(野人)이며, 두목격인 송강은 틀에 박힌 인간형으로 묘사되어 별로 매력이 없다. 이런 점에서 《삼국지연의》의 유비,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공통된 성격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호지》의 탁월한 인물묘사의 기교와 표현예술은 중국소설 중에서도 굴지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호지》의 줄거리는, 송(宋)·원(元) 무렵에 많은 민중·예능인·문인 등의 손으로 창조되었던 것을 시내암이 편집한 것인데, 송대의 《선화유사(宣和遺事)》에는 수호의 36명의 영웅 이야기가 있고,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의하면 송말의 공성여(聖與)가 36명의 화찬(畵讚)을 만들었다 하며, 《곡해총목제요(曲海總目提要)》에 의하면 송나라의 화가 이숭(李嵩)이 화상을 그렸다 한다. 또 《취옹담록(醉翁談錄)》이나 원나라의 잡극(雜劇)에도 수호의 인물들이 나오며,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고유(高儒)의 《백천서지(百川書誌)》에는 시내암이 쓰고 나관중이 편찬한 《충의(忠義) 수호지》 100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일부를 삭제하고 편수한 것이 곽훈(郭勳)의 100회본이며, 이것이 조본(祖本)이 되어 여러 종류의 《수호지》가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 천계 숭정(天啓崇禎) 연간의 양정견(楊定見)의 120회본 《충의수호지전(全)》을 명말 청초(明末淸初)에 김성탄(金聖嘆)이 다시 손질한 《제5재자서(第五才子書) 수호지》 70회본이 유행하게 되었다. 《수호지》가 후일의 문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명(明)·청(淸)의 희곡 중에는 《수호지》에서 취재한 것이 많고, 《금병매(金甁梅)》는 부분적으로 확대하여 창조를 더했으며, 《설악전전(說岳全傳)》 안의 일부 인물은 수호의 영웅들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침(陳)은 《수호후전(後傳)》을 썼으며, 유만춘(兪萬春)은 《결(結)수호지》라고도 하는 《탕구지(蕩寇志)》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