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류큐 국기는 ´태극기´였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⑤-이중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한국의 빼어남을 모아놓고 중국과는 보차 관계, 일본과는 순치 관계"
강효백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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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류큐와 미국 대통령들 9. 독도와 다케시마, 센카쿠와 댜오위다오 10. 동북공정과 류큐 11. G2시대 중국, 해양대국화로 몰입하다 12. 중국 차세대 팽창목표는 류큐와 동해? |
잊어버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다.
잊혀진 왕국 류큐의 역사를 대체로 구분하면 5단계로 나누어진다.
1.해상무역 왕국의 황금시대(14세기~1609년)
2.중국-일본에 의한 제1차 이중 종속시대 (1609년~1879년)
3.제1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879년~1945년)
4.미국-일본에 의한 제2차 이중 종속시대(1945년~1972년)
5.제2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972년~?)
해상왕국, 류큐의 황금시대
류큐는 독립왕국이었다. 류큐는 지리 역사적 풍토의 특수성에 조성된 고유한 전통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해상왕국이었다.
규슈와 타이완 사이의 태평양에 점점이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안사(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12세기경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 왕조가 탄생하였다.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최강이었고 산북왕국이 최약체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제도는 미개한 상태였다.
◇ 삼국(삼산)시대의 류큐왕국. 출처 http://image.baidu.com/ |
1406년 중산왕 찰도(察度)의 왕세자 무녕(武寧)은 재상 파지(巴志)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파지는 1416년에는 산북왕국을, 1429년에는 산남왕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했다. 조선의 세종대왕 시절에 해당하는 1430년,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尙)씨를 하사하여 그를 중산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역사는 상파지를 ‘제1 상씨왕조의 개창자’로 부른다.
제7대 상덕(尙德)왕은 쿠메지마, 도쿠노지마 등 오키나와 주변의 열도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1469년에 발생한 궁정 쿠테타에 의해 참살당하였다. 이듬해 어쇄측관(御锁侧官·지금의 재무부 장관)에서 왕으로 추대된 금원(金圆)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부친상을 입었다고 보고하였다. 1472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금원을 상원(尙圓)으로 성을 바꿔 부르고 그를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류큐왕국사의 ‘제2 상씨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제3대 상진(尙眞)왕의 재위기간(1478~1525)은 류큐의 황금시기였다. 상진왕은 북으로는 토카라 열도, 남으로는 미야코와 아에야마 열도를 정복하여 류큐 군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또한 상진왕은 류큐의 품관제도, 신관제도, 조세제도 등을 정비하고, 순장의 악습을 폐지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 류큐 군도의 족장들을 슈리성에 거주하게 하고 사인(私人)의 무기소지를 금지하는 등 류큐의 정치경제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한 몸에 겸했다고나 할까. 상진왕은 동아시아 해상왕국 류큐의 최고 명군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의 중개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류큐 무역선의 활동범위는 조선의 부산포, 중국의 푸젠과 광둥, 일본의 규슈, 안남(베트남), 샴(타이), 자바(인도네시아), 루손(필리핀), 말라타(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전역의 해외무역을 주름잡게 되었다.
특히 류큐는 명나라에 2년에 1회씩의 조공무역을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무역을 행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중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 류큐왕국의 슈리궁전(오키나와 소재). 출처 http://wapedia.mobi/zh/%E7%90%89%E7%90%83%E5%9B%BD?t=2.7 |
조선을 사랑하였던 만국의 가교, 류큐왕국
지금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는 슈리 왕궁의 정전에 걸려있던‘류큐만국진량(琉球萬國津梁·류큐 만국의 가교)’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문이 세겨 있다.
“류큐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중국)과 밀접한 보차(輔車·광대뼈와 턱)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이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 솟아난 봉래도(蓬萊島·낙원)이다. 선박을 항행하여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琉球国者,南海胜地而钟三韩之秀,以大明为辅车,以日域为唇齿,在此二中间涌出之蓬莱岛也,以舟楫为万国之津梁,异产至宝)”
동종의 명문이 한-중-일 동북아 삼국 중에서도 조선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데에서 류큐는 다른 나라를 좀처럼 침략할 줄 모르는 평화애호국인 조선에 대하여 동병상련이라 할까, 각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큐가 조선보다 양국간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개국 원년 1392년, 류큐 국왕의 명을 받을 공식 사절단이 조선을 예방하여 태조 이성계를 알현하였다. 태조는 사절단대표에게 정5품, 수행원들에게 정6품에 준하는 대우를 베풀었다. 류큐는 조선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인 셈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류큐 공식 사절단의 조선방문은 40회인데 반하여 조선 사절단의 류큐방문은 3회로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도 양국의 각종 사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류큐와의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기간 1469~1494)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류큐 왕국에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슈리성 아래 있는 연못가의 한 건물이 대장경을 보관하던 장경판고였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중의 한 사람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류큐는 땅은 좁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무역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서쪽으로는 남만(동남아시아)및 중국과 통하고, 동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통하고 있다. 일본과 남만의 상선들도 류큐 수도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점포를 설치하고 무역을 한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허균의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소개되는 류큐 남서부 아에야마(八重山) 민란의 주인공이며 민중 영웅인 적봉(赤峰) 홍(洪)가와라와 동일한 인물임을 주장하는 학설마저 있다(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대학교출판부,2004년). 설성경 교수는 홍길동은 연산군에 의해 비밀리에 석방되었으며 홍길동이 진출한 율도국이 바로 지금의 류큐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예로부터 조선과 류큐가 이처럼 밀접한 교류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국의 뛰어난 해상운송능력과 쿠로시오해류 덕분이었다. 계절풍을 타고 동남아로 남하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류큐에 도착할 수 있고, 조난당한 조선인들이 류큐에 많이 표착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게다가 뛰어난 해상왕국이었던 신라와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이 동남아 항해의 출발점이 될 류큐에 주목을 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조선과의 무역에 류큐는 적극적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각국의 물산을 매매하는 시장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부산포로 향하는 류큐 무역선의 항해 루트는 ‘왜구’가 출몰하는 바다였다. 류큐는 15세기 말엽에 방침을 바꿔 조선에 직접 무역선을 파견하지 않고 규슈와 대마도의 상인을 매개로 한 간접 무역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들이 류큐의 사신이라고 사칭하며 조선과의 무역을 요구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류큐 사이의 직접 무역은 빈껍데기만 남고, 양자 사이에 왜구가 끼어드는 형태가 되었다.
◇ 류큐만국진량종9키나와 현립박물관 소재). 출처 http://image.baidu.com/ |
류큐의 황금시기는 1609년 도쿠가와 막부의 사주를 받은 사스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2011.1.26-2.1. 화산이 폭발적 분화를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 류큐를 침략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609년 3월 22일 사스마 번주 시마즈는 3천여 병사를 100여척의 함선에 싣고 가와야마(川山)항을 출항하였다. 4월 1일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4월 5일 슈리성을 함락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속에서 무사 안일의 단잠을 자고 있던 류큐는 일본의 무력침략에 저항다운 저항을 못해보고 불과 닷새 만에 정복되어 버렸다. 5월 17일 사스마군은 상녕왕과 왕자와 관리들 백 여명을 포로로 잡아 사스마 번으로 끌고 갔다. 사스마 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당시 류큐에 군량징발 요구를 하였는데 류큐가 이를 거부하자 사스마번이 대신 지불한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침략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류큐를 정벌해서 얻은 이익으로 사스마가 임진왜란과 일본내전에 참전시에 들어갔던 군비와 손실을 충당하려는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류큐 사이의 무역이익을 갈취하려는 것이었다.
상녕왕은 사스마 번에 끌려간지 2년 만에 돌아와 복위되었지만 그때부터 류큐는 왕년의 해상독립왕국 다운 면모는 사라지게 되었다. 류큐의 역사서 <구양>(球陽)은 '사스마 번은 류큐에 재번봉행(在番奉行)이라는 감독관을 슈리성에 주재하게끔 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농지를 측량하고 감독관 휘하에게 분배해주고, 사스마번에 막대한 세금과 공물을 바칠 것과 사스마의 허가없이 제3국과의 무역을 금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사스마번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된 류큐는 1693년 토카라지마 등 류큐 북부 5개 섬을 사스마번에 할양하였다. 현재 류큐 군도 최북단의 섬들인 토카라 제도의 행정구역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결국 류큐는 ‘아빠 나라 중국’, ‘엄마 나라 일본’을 옹알거려야 연명할 수 있는 병든 병아리처럼 쇠약한 이중속국이 되어버렸다. 중국은 책봉체제하에서 류큐를 상징적으로만 지배했으나 경제적으로 수탈하지 않았던 반면, 일본은 사스마번을 통하여 가혹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류큐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스마번은 류큐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네지 조수(羽地朝秀 1617~1676)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에 명하여 류큐와 일본이 고대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류큐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대화민족이라는 논조, 즉 일본과 류큐는 조상이 같다는 ‘일유동조론(日琉同祖論)’에 근거한 류큐 국사 <중산세감>(中山世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스마번은 중국 몰래 류큐의 무역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 황제가 파견한 ‘천사(天使·천자의 사절)’가 류큐왕을 책봉하기 위하여 류큐로 올 때마다 그 섬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흔적을 감추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말엽에 이르기까지도 류큐가 오래전에 이중 속국이 되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1847년 청나라 정부는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尙泰)를 책봉하기 위하여 조신(趙信)을 책봉사로 파견하였는데 조신이 보고한 <속유구국지략>에는 일본이 류큐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 류큐국기(1854-1879).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lag_of_the_Ryukyu_Kingdom.svg?uselang=zh |
1854년 3월,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이 가나자와에 흑선 함대를 정박시켜놓고 에도 막부와의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류큐의 나하 항을 개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측은 ‘류큐는 아주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 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둘러대었다.
그러자 1854년 7월 페리제독은 직접 류큐의 나하항으로 예의 흑선 함대를 몰고 왔다. 결국 류큐 정부는 페리 제독과 나하항을 개항한다는 내용의 영문과 중문으로 각각 기재된 ‘미-류(琉)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류큐는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미합중국정부와 국제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류큐는 역시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1855년에 프랑스, 1859년에 네덜란드, 1860년에 이탈리아와의 수호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다.
류큐가 체결한 국제조약들에 어떠한 이의표시도 하지 않던 일본은 1871년 청나라에 대만에서의 류큐인 살해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면서 류큐인은 일본인이고 류큐는 일본영토라고 공언하였다. 1874년, 메이지 유신정권의 우이를 쥐고 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정부에 외교수단만으로 류큐의 병탄이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프랑스 국적 법률고문 바나쌍의 자문을 받은 오쿠보는 만국공법(국제법)상의 조약은 얼마든지 왜곡 가능한, 즉 해석하기 나름인 종잇조각일 뿐이며, 무력에 의해서만 류큐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오쿠보의 변설은 메이지정부의 제국주의 대외팽창노선의 일환으로 최우선 채택되었다. 류큐는 일본제국주의의 첫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75년 초, 오쿠보는 류큐의 3정승격인 삼사관들을 도쿄로 소환하여 류큐에 대한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오쿠보는 삼사관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류큐의 정치제도를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식으로 뜯어고칠 것과 청나라에 조공을 금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삼사관들은 오쿠보의 요구는 류큐에 대한 자살명령이나 다름없다고 판단, 즉답을 피하고 류큐로 돌아가 류큐왕에게 보고한 후에 왕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사관들의 보고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류큐왕은 시일을 최대한 끄는 지연책을 쓰는 한편 청나라에 비밀리에 조공을 계속 바칠 것을 주문하였다. 류큐왕은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지속해야만 장래 류큐가 청나라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 일본과 류큐를 개항시켜 각각 화친조약을 체결한 페리제독. |
일제의 첫 먹잇감이 된 류큐, 30년 후 대한제국
일본은 류큐의 이러한 지연책을 그냥 두지 않았다. 1875년 7월, 일본은 내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를 류큐에 파견하여 이른바 ‘마쓰다 10개조항’을 반포하게 하였다.
1. 2년에 1회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과 청 황제 즉위식에 경축사절을 파견하는 것을 금함.
2. 류큐 번왕의 즉위시에 청의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함
3. 류큐는 메이지의 연호를 따라야 하고 일본의 의례를 받을 것
4. 형법은 일본이 정하는 바대로 시행하여야 하며 2-3명의 전문가를 도쿄에 파견하여 학습할 것
5. 류큐번의 내정을 개혁할 것, 류큐 번왕은 1등관으로 보하고 관제를 개정하여 칙임, 진임, 판임 및 등외관의 명목을 정할 것
여기에다 마쓰다는 자신의 설명서를 덧붙여 여러 조항을 증가시켰다.
6. 청의 연호를 따른 것을 금한다.
7. 류큐 번왕은 반드시 직접 정책을 집행하여야 하고 섭정할 수 없다.
8. 중국 푸저우(福州)에 있는 류큐 영사관을 폐지하고 류큐의 상업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하에 둔다.
9. 류큐 번왕 자신이 직접 도쿄로 와서 메이지 천황의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10. 일본은 류큐 번내에 일본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마쓰다 10개 조항’이 공포되자 류큐의 각지 주민들은 격분하여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상태왕은 충격에 빠져 며칠간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다. 류큐측 삼사관과 일본측 마쓰다간의 논쟁의 귀결점은 류큐가 계속 중국과 일본의 이중종속국 지위를 유지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훈령을 받고 온 마쓰다측이 물러날 리 없었으며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류큐 측은 청의 책봉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중-일 양국을 부모의 나라로 여겨온 류큐왕국의 기틀을 갑작스레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이라 하며 난색을 표하였다. 연호에 관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연호를,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온 것이 관례이므로 갑자기 고칠 수는 없는 일이며, 류큐왕의 도쿄행도 왕자가 대행토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류큐의 지배층은 마쓰다 10개조항의 수용은 곧 그들의 지배체제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국가존망의 일대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반발하였다. 류큐의 평민층의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류큐 평민들은 각급학교에 운집하여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것을 촉구하는 대일본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슈리성의 민중들은 마쓰다가 머무는 숙소 앞에 시위를 벌이고 즉각 류큐땅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2개월에 걸친 지리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마쓰다는 일단 빈손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쓰다가 귀국선에 오르자마자 류큐왕은 도쿄에 친서를 휴대한 특사단을 보낸다.
“류큐와 중국은 5백여 년에 걸쳐 서로 인연을 맺어 왔으며 신의로 연결되어 있어 그 인연을 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은 줄로 알며, 더구나 중국식 직제와 연호 및 의례 등을 일거에 폐지하고 귀 일본정부를 따르는 일이라는 실로 곤란한 줄 아뢰오.”
류큐의 특사들은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세 오쿠보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일본이 청나라와 직접 교섭하여 ‘마쓰다 10개조항’을 청나라가 승인한다면 류큐도 일본의 요구에 따를 것이라고 마지노선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오쿠보는 류큐가 일본의 판도라는 사실은 이미 청나라가 명시적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는바, 류큐는 순전히 일본 내정문제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류큐가 청나라에 직접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4세에 미국공사가 되어 이름을 떨친 외교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즉 모든 류큐 주민이 청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우선 일본정부에 신청하여 여행허가를 얻어야 하며, 사사로이 청나라를 여행하는 자는 극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그해 일본정부는 류큐에 대한 관리를 외무성에서 내무부로 전환하는 등 류큐의 외교권과 사법권을 박탈하여 완전한 류큐병탄의 길을 닦아 놓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1905년,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아라사키 모리테루 저, 김경자 역, “또 하나의 일본; 오키나와 이야기” [역사비평] 1988.
高良創吉, [琉球王國],東京: 岩波書店, 1993.
謝必震, 胡新, [中琉關係史料與硏究], 北京: 海軍出版社,2010.
高之國,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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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2011-02-05 데일리안)
참고자료
"신라 우산국이 일 오키나와 670년 지배"
´류구국´ 건국…´서울ㆍ엄마ㆍ안사람´ 오키나와 말과 유사
일 고문헌 분석ㆍ현장 답사 담은 저서 내달 출간
지난해 ´독도 영토권원 연구´ 논문으로 성균관대 박사 학위를 받은 선우영준 수도권대기환경청장은 일본 고문헌 조사와 3차례에 걸친 오키나와 현지 답사를 통해 오키나와의 전신인 류구국(琉球國)이 고대 울릉도 주민들의 이주로 세워진 나라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21일 밝혔다.
저서에 소개된 관련 문헌 등에 따르면 일본 고서인 ´류구국구기´(琉球國舊記ㆍ1731년), ´고류구´(古琉球ㆍ1890년) 등 수십권의 문헌 분석 결과 우산국은 512년 신라 이사부에 의해 복속된 직후 자원 부족 등 이유로 오키나와(´우루마´국이 전신) 남부 쿠다카 섬 등에 먼 항해 끝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당시 우산국 주민들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천손씨(天孫氏)로 불리던 집단으로 울릉도에 풍부했던 느티나무로 만든 선박에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전역으로 세력을 뻗쳐 670년간 왕위를 유지했으나 1187년 국왕이 중신에 살해된 뒤 멸망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내전 등 오랜 혼란기를 겪다 일본 에도막부가 류구국을 침공,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막부측은 류구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삭제했으며 마치 구주(九州)에서 오키나와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조작해 왔다고 저서는 주장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고문헌을 참조, 주민들의 혈족 계통을 연구한 결과 오키나와 남자 주민의 Y-염색체가 한반도에서 형성된 한국인 특유의 Y-염색체(O2b1a)와 대부분 동일하고 인근 대만 등의 원주민 염색체와는 판이하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어 오키나와가 한국인의 개척으로 이뤄진 나라임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오키나와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과 고대 국어(또는 현대 국어)간에 음과 뜻이 유사한 단어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오키나와 신가(神歌)에 나오는 ´소우루´는 ´서울´의 일본 가나식 표기로 추정되고 일본학자들은 신라의 수도 ´서벌(徐伐)´을 ´쇼-우루´라고 읽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키나와 치닌 지역 귀족마을에서 쓰이는 ´우마니´는 우리말 ´어머니´와 뜻이 같고 비슷한 발음을 내고 있으며 치닌 지역 평민 마을에서는 ´암마´라고 발음된다.
오키나와 전통 언어인 ´안사레´는 우리말 ´안사람(안주인)´을 의미하는데 발음이 비슷하고 ´바루´는 우리말의 ´벌(또는 벌판, 뻘)´과 같은 말이다.
´요나구스쿠´라는 말은 오키나와에서 최초의 명문가 등을 의미하는데 ´요나´는 한국어 고어 사전에 ´여나´로 표기, ´새로 연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구스쿠´는 한국 고어 ´구즉하다´(´우뚝하다´의 의미)의 뜻으로 서로 통한다.
선우 박사는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에는 1천500년 전 한국 말과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며 "한국과 오키나와 간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진다면 한일 고대 역사의 전면적인 재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선우 박사는 3월 중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독도 그리고 우루마국-류구국을 찾아서´(가칭) 제하의 저서 출간할 예정이다.
[2007-02-22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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