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한국의 1970년대 후반은 격동기였다. 78년 3월 원광대 대학원을 다니려고 전북 이리에 도착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77년 11월 발생) 때 깨진 유리 조각과 건물 파편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79년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고 80년엔 광주사태를 목격했다.”
33년간 한국을 지켜보고 경험한 류밍량(劉明良·57·사진) 주한 타이베이(臺北) 대표부 신문조장(공보참사관). 1978년 3월 대학원생 신분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대만에 돌아가 외교관이 된 류밍량은 한국에서 세 번, 각각 4년을 근무했다. 그래서 한국사람처럼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익숙한 외국인으로 손꼽힌다. 지난 6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서울예선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을 정도다. 한국의 산업화·민주화, 한류(韓流)를 보는 시각도 예리하다. 그는 “한국인의 자신감과 전통문화가 가장 큰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슬픈 외교관’이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만과는 국교가 단절됐기 때문에 그는대사관이 아니라 ‘타이베이 대표부’란 명함을 들고 사람을 만난다. 외교관과 민간인의 중간지대에 서 있다.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빌딩 6층 대표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33년간 한국을 오가면서 어떤 장면들이 인상에 남나.
“타이베이에서 80년 12월 외교관 면접시험을 봤는데 다이루이밍(戴瑞明) 당시 외교부 차관이 “한국의 발전 전망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어떤 민족이든 자신감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데 한국은 자신감이 넘치는 나라”라고 답했다. 지난달 하순 미스서울 선발대회 때 5명의 미녀를 인터뷰했다. ‘한류(韓流)의 성공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33년 전 내가 했던 답변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바로 전통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한류(韓流)란 단어는 97년께 대만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대만에는 원래 ‘한파주의보’를 뜻하는 한류(寒流)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영애·차인표가 출연한 ‘불꽃’이란 TV드라마가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한국 드라마들의 경쟁력이 무서우니 대만 연예계가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대만 언론들이 寒流를 韓流로 바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발전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골프·야구·축구·수영 같은 스포츠에서 승승장구하고,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원동력인 것 같다. 한국인은 단결력과 조직 능력이 뛰어나다. 대만에선 62년부터 중국어권 영화를 상대로 금마장(金馬奬)영화제를 해왔는데, 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가 금마장을 훨씬 앞섰다.”
-한국 근무 중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
“99년 두 번째 한국 근무 때 린준셴(林尊賢·당시 72세) 대사가 외교관생활 40년을 정리하며 이런 얘기를 해줬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친구로 사귈 수 있는 나라다. 등 뒤에서 칼을 찌르지 않는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나는 각계각층의 한국 친구 수백 명을 사귀었다. 옛날에 원광대 다녔을 땐 한의대생 친구가 많았는데 시험 기간엔 하숙방으로 나를 찾아와 한자를 묻고 같이 공부하곤 했다. 그들 중엔 한방병원장이나 한의사가 된 사람이 많다. 지금도 변함없는 친구들이다. 2001년엔 한국 언론에 “TV 드라마에 흡연 장면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기고문을 실었는데 그 뒤에 흡연 장면이 많이 줄어들었다. 금연운동에 일조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외국인 상대의 한글교
육 강좌 등도 제안했는데 많이 활성화됐다.”
-한국이 80년대와 가장 달라진 점은 뭔가.
“옛날엔 현대식 건물이 많지 않았다. 서울 도심도 많이 변화했다. 역사 유적지와 현대식 빌딩을 잘 어울리게 개발한 것 같다. 예컨대 경복궁 주위 건물들을 보면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돼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수준이 높아져 자가용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80년대엔 자가용 있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대만에선 돈을 아껴 쓰는 편인데 한국은 소비를 더 많이 한다. 하지만 사람끼리 만났을 때 상하
관계를 지키는 유교적 가치관은 여전한 것 같다.
“한국의 1970년대 후반은 격동기였다. 78년 3월 원광대 대학원을 다니려고 전북 이리에 도착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77년 11월 발생) 때 깨진 유리 조각과 건물 파편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79년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고 80년엔 광주사태를 목격했다.”
33년간 한국을 지켜보고 경험한 류밍량(劉明良·57·사진) 주한 타이베이(臺北) 대표부 신문조장(공보참사관). 1978년 3월 대학원생 신분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대만에 돌아가 외교관이 된 류밍량은 한국에서 세 번, 각각 4년을 근무했다. 그래서 한국사람처럼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익숙한 외국인으로 손꼽힌다. 지난 6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서울예선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을 정도다. 한국의 산업화·민주화, 한류(韓流)를 보는 시각도 예리하다. 그는 “한국인의 자신감과 전통문화가 가장 큰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슬픈 외교관’이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만과는 국교가 단절됐기 때문에 그는
-33년간 한국을 오가면서 어떤 장면들이 인상에 남나.
“타이베이에서 80년 12월 외교관 면접시험을 봤는데 다이루이밍(戴瑞明) 당시 외교부 차관이 “한국의 발전 전망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어떤 민족이든 자신감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데 한국은 자신감이 넘치는 나라”라고 답했다. 지난달 하순 미스서울 선발대회 때 5명의 미녀를 인터뷰했다. ‘한류(韓流)의 성공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33년 전 내가 했던 답변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바로 전통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한류(韓流)란 단어는 97년께 대만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대만에는 원래 ‘한파주의보’를 뜻하는 한류(寒流)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영애·차인표가 출연한 ‘불꽃’이란 TV드라마가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한국 드라마들의 경쟁력이 무서우니 대만 연예계가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대만 언론들이 寒流를 韓流로 바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발전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골프·야구·축구·수영 같은 스포츠에서 승승장구하고,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원동력인 것 같다. 한국인은 단결력과 조직 능력이 뛰어나다. 대만에선 62년부터 중국어권 영화를 상대로 금마장(金馬奬)영화제를 해왔는데, 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가 금마장을 훨씬 앞섰다.”
-한국 근무 중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
“99년 두 번째 한국 근무 때 린준셴(林尊賢·당시 72세) 대사가 외교관생활 40년을 정리하며 이런 얘기를 해줬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친구로 사귈 수 있는 나라다. 등 뒤에서 칼을 찌르지 않는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나는 각계각층의 한국 친구 수백 명을 사귀었다. 옛날에 원광대 다녔을 땐 한의대생 친구가 많았는데 시험 기간엔 하숙방으로 나를 찾아와 한자를 묻고 같이 공부하곤 했다. 그들 중엔 한방병원장이나 한의사가 된 사람이 많다. 지금도 변함없는 친구들이다. 2001년엔 한국 언론에 “TV 드라마에 흡연 장면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기고문을 실었는데 그 뒤에 흡연 장면이 많이 줄어들었다. 금연운동에 일조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외국인 상대의 한글교
육 강좌 등도 제안했는데 많이 활성화됐다.”
-한국이 80년대와 가장 달라진 점은 뭔가.
“옛날엔 현대식 건물이 많지 않았다. 서울 도심도 많이 변화했다. 역사 유적지와 현대식 빌딩을 잘 어울리게 개발한 것 같다. 예컨대 경복궁 주위 건물들을 보면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돼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수준이 높아져 자가용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80년대엔 자가용 있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대만에선 돈을 아껴 쓰는 편인데 한국은 소비를 더 많이 한다. 하지만 사람끼리 만났을 때 상하
관계를 지키는 유교적 가치관은 여전한 것 같다.
대만에선 한국을 아주 부러워한다. 한국 경제가 최근 10년 새 많이 발전했다. 80∼90년대엔 각종 시위와 농성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민주국가로서 한국은 법치주의가 많이 자리 잡았다. 인상 깊은 게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이광재 강원지사가 당선됐는데 뇌물 수수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광재 지사 측은 판결에 불복해 “헌법정신은 대법원 판결 때까지 ‘무죄 추정’”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승소했다. 이후 도지사로 일하다가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자 지사 직을 떠났다. 그것을 보면서 한국은 참 성숙한 나라가 됐다고 생각했다. 옛날 같으면 ‘야당 탄압’이니 정치박해라며 싸웠을 건데….”
-한국 사회가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교통질서를 개선할 공간이 많다. 신호 준수와 보행자 존중 같은 부분은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 대만에선 무인카메라가 많이 설치돼 교통질서 위반행위가 많이 줄었다.”
-대만은 90년대 후반 한류의 출발지였다. 한류의 강점은 뭔가.
“한국 드라마·영화에는 유교사상이 잘 집약돼 있다. 대만·중국 사람들은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옛 문화에 향수를 느낀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는 부분이다. 연기자들의 미모와 연기력도 뛰어나다. 대만 정부도 한류처럼 태류(臺流:대만 대중문화의 국제화)를 육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류는 정부 지원 때문이 아니라 제작환경을 개선하고 사회환경이 뒷받침돼 성공한 것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의도적으로 육성했다면 안 됐을 것이다. 나무를 자라게 하려면 물과 비료를 주는 것보다 나무가 자랄 토양과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중요하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만은 한국보다 잘살았던 것 같다. 양쪽의 생활을 비교하자면.
“1인당 국민소득은 비슷하지만 일반 서민생활을 보면 대만이 더 나은 편이다. 물가도 싸고 생활도 안정돼 있다. 대만에선 공립대학 등록금이 연 200만원, 사립대학은 연 400만원밖에 안 된다. 한국 사람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과시형 소비를 많이 하지만 대만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대만은 중소기업과 정보기술(IT)산업이 호조를 보인다. 요즘엔 BT에 투자를 많이 한다.”
-한국·대만 모두 일제 식민지였는데 대만의 반일 감정이 약한 이유는.
“1895년 청·일 갑오전쟁 뒤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그전까지 중국은 대만을 중국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대만 사람들 역시 중국을 조국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대만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만에 많이 투자하고 대만인에게 잘 대해줬다. 일본은 1945년까지 50년간 대만을 통치하면서 교육·통신·철도·호적제도 등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런 점이 작용한 것 같다.”
-서울이나 부산·인천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차이나타운을 세우려면 화교사회와 고객·소비층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 사는 화교 숫자가 너무 적다. 대만 음식이 맛있지만 한국에서 문을 열면 장사가 안 되는 이유다.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식당과 수퍼마켓, 학교, 병원 등이 밀집해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화교는 대만 출신이 아니라 산둥(山東) 출신이 대부분이다. 한국화교협회에 2만 명쯤 등록돼 있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살거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만에선 반한 감정이 강했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태권도 종목에서 양수쥔 선수가 실격패를 당한 뒤 대만 정치인들이 반한 감정을 다시 이용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수쥔 사건 때 대만 정치인과 언론들이 반한 감정을 많이 과장했다. 그해 12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이 표를 얻으려 기자들을 불러놓고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 제품 불매운동을 외쳤다. 반한 감정은 80년대에도 있었다. 존스컵 농구대회가 열릴 때면 이충희·박찬숙 선수가 너무 잘하니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 한국 선수들은 부딪치기만 하면 넘어진다’고 대만 언론은 비꼬았다. 90년대 후반 들어 한류 바람이 세지다 보니 대만 연예인들이 일거리를 잃었다. 그러나 대만에선 매일 밤 수백만 명이 한국 드라마를 본다. 한국 드라마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한국어를 공부하는가. 가족들은 한국 생활에 만족하나.
“한국어에 한자어가 많지만 대만과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게 많다. 날마다 신문을 보며 신조어나 외래어를 공부한다. 아내와 아들 둘(26, 23세), 딸(19세)이 있다. 99년엔 가족 모두 한국에서 살았는데 2007년에 올 때는 아내와 딸만 왔다. 가족들은 한국의 기후도 좋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며 좋아한다. 지난해 타이베이로 돌아간 아내는 등산을 무척 좋아해 북한산을 자주 다녔는데 등산 친구가 많았다.”
-한국에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은 중국 대륙을 의식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너무 매달린다.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겠지만 비정치 분야에선 유연성을 발휘해 협력을 확대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했으면 좋겠다. 한국은 대만의 4위 교역상대, 대만은 한국의 9위 교역상대다. 지난해 한국에 온 대만 관광객은 42만 명이나 됐다. 얼마 전 삼성이 대만 TSMC(台積電)그룹의 핵심 기술인력을 스카우트했다. 반도체·전자 분야는 경쟁하면서 협력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이나 콘텐트 교류, 중국 시장 진출 등 협력할 분야가 많다.”
-한국 사회가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교통질서를 개선할 공간이 많다. 신호 준수와 보행자 존중 같은 부분은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 대만에선 무인카메라가 많이 설치돼 교통질서 위반행위가 많이 줄었다.”
-대만은 90년대 후반 한류의 출발지였다. 한류의 강점은 뭔가.
“한국 드라마·영화에는 유교사상이 잘 집약돼 있다. 대만·중국 사람들은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옛 문화에 향수를 느낀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는 부분이다. 연기자들의 미모와 연기력도 뛰어나다. 대만 정부도 한류처럼 태류(臺流:대만 대중문화의 국제화)를 육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류는 정부 지원 때문이 아니라 제작환경을 개선하고 사회환경이 뒷받침돼 성공한 것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의도적으로 육성했다면 안 됐을 것이다. 나무를 자라게 하려면 물과 비료를 주는 것보다 나무가 자랄 토양과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중요하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만은 한국보다 잘살았던 것 같다. 양쪽의 생활을 비교하자면.
“1인당 국민소득은 비슷하지만 일반 서민생활을 보면 대만이 더 나은 편이다. 물가도 싸고 생활도 안정돼 있다. 대만에선 공립대학 등록금이 연 200만원, 사립대학은 연 400만원밖에 안 된다. 한국 사람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과시형 소비를 많이 하지만 대만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대만은 중소기업과 정보기술(IT)산업이 호조를 보인다. 요즘엔 BT에 투자를 많이 한다.”
-한국·대만 모두 일제 식민지였는데 대만의 반일 감정이 약한 이유는.
“1895년 청·일 갑오전쟁 뒤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그전까지 중국은 대만을 중국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대만 사람들 역시 중국을 조국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대만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만에 많이 투자하고 대만인에게 잘 대해줬다. 일본은 1945년까지 50년간 대만을 통치하면서 교육·통신·철도·호적제도 등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런 점이 작용한 것 같다.”
-서울이나 부산·인천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차이나타운을 세우려면 화교사회와 고객·소비층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 사는 화교 숫자가 너무 적다. 대만 음식이 맛있지만 한국에서 문을 열면 장사가 안 되는 이유다.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식당과 수퍼마켓, 학교, 병원 등이 밀집해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화교는 대만 출신이 아니라 산둥(山東) 출신이 대부분이다. 한국화교협회에 2만 명쯤 등록돼 있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살거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만에선 반한 감정이 강했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태권도 종목에서 양수쥔 선수가 실격패를 당한 뒤 대만 정치인들이 반한 감정을 다시 이용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수쥔 사건 때 대만 정치인과 언론들이 반한 감정을 많이 과장했다. 그해 12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이 표를 얻으려 기자들을 불러놓고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 제품 불매운동을 외쳤다. 반한 감정은 80년대에도 있었다. 존스컵 농구대회가 열릴 때면 이충희·박찬숙 선수가 너무 잘하니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 한국 선수들은 부딪치기만 하면 넘어진다’고 대만 언론은 비꼬았다. 90년대 후반 들어 한류 바람이 세지다 보니 대만 연예인들이 일거리를 잃었다. 그러나 대만에선 매일 밤 수백만 명이 한국 드라마를 본다. 한국 드라마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한국어를 공부하는가. 가족들은 한국 생활에 만족하나.
“한국어에 한자어가 많지만 대만과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게 많다. 날마다 신문을 보며 신조어나 외래어를 공부한다. 아내와 아들 둘(26, 23세), 딸(19세)이 있다. 99년엔 가족 모두 한국에서 살았는데 2007년에 올 때는 아내와 딸만 왔다. 가족들은 한국의 기후도 좋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며 좋아한다. 지난해 타이베이로 돌아간 아내는 등산을 무척 좋아해 북한산을 자주 다녔는데 등산 친구가 많았다.”
-한국에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은 중국 대륙을 의식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너무 매달린다.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겠지만 비정치 분야에선 유연성을 발휘해 협력을 확대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했으면 좋겠다. 한국은 대만의 4위 교역상대, 대만은 한국의 9위 교역상대다. 지난해 한국에 온 대만 관광객은 42만 명이나 됐다. 얼마 전 삼성이 대만 TSMC(台積電)그룹의 핵심 기술인력을 스카우트했다. 반도체·전자 분야는 경쟁하면서 협력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이나 콘텐트 교류, 중국 시장 진출 등 협력할 분야가 많다.”
(2011-07-17 중앙선데이 이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