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왜곡, 팽창주의 문제

<사람들> 독도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씨

Smart Lee 2011. 8. 14. 12:38

<사람들> 독도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씨

日 6ㆍ25전쟁 직후 욕심..50여차례 목숨 건 전투로 지켜

"독도 지킬 인재 키우고 日 억지 결코 좌시해선 안돼"

"남편이 1969~1976년 세 차례나 독도에 주민이 살도록 개발계획서를 제출했는데 당시 정부가 무시해 지금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박영희(79ㆍ여)씨는 14일 구리시 자택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일본이 수위를 높여 독도를 넘보고 국제 지도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는 일련의 사태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거실에 있는 대형 독도 사진, 태극기, '대한의 얼 독도사랑'이라고 쓰인 액자가 박씨의 지독한 독도 사랑을 짐작하게 했다.

박씨는 1953년 4월~1956년 12월 일본군과 어선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낸 고(故) 홍순칠(1929~1986년) 독도의용수비대장의 미망인이다.

그는 20살 때 홍대장과 결혼해 울릉도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1남3녀를 낳았다. 그 역시 대원으로 활약하며 후방에서 무기와 식량 공급을 맡았다.

독도의용수비대는 6ㆍ25전쟁에 참전하고 나서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온 군인 21명과 주민 12명에 의해 1954년 4월 결성됐다.

당시는 무장함정의 호위를 받은 100t급 일본 어선들이 독도와 울릉도 연해에 자주 출몰, 우리 어민을 쫓아낸 시기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단순히 어업을 위한 게 아니라 실효적 지배를 통해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의 야욕으로 규정하고 의기투합했다.

일본은 6ㆍ25전쟁 직후 국내 상황이 혼란한 틈을 타 독도에 욕심을 냈다고 박씨는 전했다.

하지만 힘이 모자랐다.

가진 무기라곤 거의 못쓰게 되다시피 한 6ㆍ25전쟁 때 소총과 박격포가 고작이었다. 정부 지원은 전혀 없었다.

열악한 상황에도 1956년 12월 독도 경비업무를 경찰에 가져갈 때까지 일본 무장함정과 50여 차례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는 "1954년 11월 '독도대첩'으로 불리는 전투에서는 전부 목숨을 잃는 줄 알았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시 일본 함정 3척이 몰려오고 공중에서는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독도의용수비대를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 포탄을 쏘지 않았다. 위력 과시를 통해 독도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박씨는 "일본어에 능한 홍대장이 정부와 민간인이 함께 독도를 지키고 있다고 수차례 얘기했다"며 "당시 일본은 괜히 포를 쐈다가 국제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이는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으로 여겼다면 의용수비대는 침략이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박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33명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덕에 일본의 독도 연해 출몰은 잠잠해졌다. 이 무렵 독도의용수비대의 군자금마저 바닥나 더 버틸 여력이 없었다고 박씨는 전했다.

대원 10명이 경찰에 임관해 독도를 담당하는 형식으로 경비 업무가 경찰로 넘어갔다.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한 지 3년8개월 만이다.

이 무렵부터 박씨의 말투에는 진한 섭섭함이 묻어 나왔다.

홍대장은 이후 독도에 주민이 살 집 5~10가구를 짓기 위해 개발 계획서를 들고 동분서주했다.

1969년과 1972년 두 차례 개발계획서를 경남도에 제출했으나 무시당했다. 1976년 제출했을 때는 예산이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홍대장은 어느 날 정보기관에 끌려가 3일간 붙잡혀 있으면서 '앞으로 독도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고 강요받기도 했다고 한다.

박씨는 "정권마다 일본 눈치를 봤다. 약소국의 서러움이었다"며 언제 흐른 지 모를 눈물을 닦아 냈다.

대원들은 1994년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그러나 '썩 기쁘지 않았다'고 박씨는 전했다.

훈장증에 '독도 수호' 대신 '국가안전보장에 이바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 중 23명이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최근 정부가 동도를 '독도이사부길', 서도를 '독도안용복길'로 정한 것이 못내 아쉽고 남편을 비롯해 독도에 젊음을 바친 대원들에게 미안했다.

그는 "이제라도 늦지 않다. 일본보다 독도를 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며 "우리나라가 강대국 반열에 오른 만큼 일본의 억지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2011-08-14 구리=연합뉴스 김도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