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

Smart Lee 2013. 8. 1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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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1)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디모데전서 4장 6절)

 

‘좋은 일꾼은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길러지는 것일까?’ 이 질문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질문이다. 기업에서는 ‘좋은 CEO는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길러지는 것일까?’를 질문하고 학문세계에서는 좋은 학자는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길러지는 것일까?’를 질문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일꾼도 역시 그러하다. 예수의 좋은 일꾼이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길러지는 것일까?’를 묻게 된다. 위에 인용한 디모데전서 4장 6절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좋은 일꾼은 양육되는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말씀과 기도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좋은 일꾼은 어떤 일꾼일까? 나는 다섯 가지를 골고루 갖춘 일꾼이 좋은 일꾼이라 생각한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확신 곧 신앙고백이 분명한 일꾼이다. 이 점이 세속 일꾼들과 예수의 일꾼들이 다른 점이다.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일꾼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자기확신이 없으면 예수의 좋은 일꾼일 수는 없다.

둘째는 파괴력이 있는 일꾼이다. 파괴력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기존체제와 기존질서에서 그릇된 것들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포할 수 있는 용기이다. 용기에 대하여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내린 멋진 정의가 있다.

"용기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두 번째, 세 번째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오늘의 시대는 너무나 타협이 능사인 시대이다.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옳은 것을 옳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냥 대세를 따라, 이권을 따라 타협하며 흘러가는 시대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이런 세상풍조에 따라 가는 것이 나니라,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행동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2)

 

 

어제 글에서 예수의 좋은 일꾼은 다섯 가지 조건을 골고루 갖춘 일꾼이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첫째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일꾼이다. 나는 70년대 유신시절 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한적이 있다. 안양교도소에 50여명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하루는 정치범들 중에 목사 전도사를 중심으로 크리스천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토론의 주제인즉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냐?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이냐? 라는 주제였다.

그 질문에 대한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한편은 "인간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요, 진정한 크리스천이다. 민주화와 통일조국 건설을 위하여 몸을 던져 희생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참 제자고, 진정한 크리스천이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앙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신앙의 실천사항으로 민주화 운동도 하고 인간 해방운동도 하고 통일 운동에도 헌신하는 사랑이라야 크리스천이고, 예수의 제자이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확실하게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동료들이 핀잔을 주었다. "김진홍은 잘 나가다가 신앙문제만 나오면 골동품으로 out of date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out of date’란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를 하는 사람이란 뜻이 담긴 표현이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곤 하였다 "그래 나는 ‘out of date’이고 그런 말을 하는 자네들은 ‘out of Jesus’다 나는 비록 시대에 뒤떨어지는 ‘out of date’ 인 사람이 되더라도 예수 밖에 있는 ‘out of Jesus’가 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in Jesus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내 생각은 변함 없다. 예수의 좋은 일꾼은 먼저 예수를 주인으로 믿어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분명하여야 한다.

 

예수의 좋은 일꾼(3)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장 37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다섯 가지를 갖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첫째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일꾼이어야 한다. 둘째는 파괴력이 있는 일꾼이어야 한다. 파괴력이란 무슨 말인가? 잘못된 전통과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하여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파괴력이 있는 사람이라 일컫는다.

이런 파괴력을 지녔던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 자신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 하셨다. 그리고 당대의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회개치 않으면 천벌을 받으리라" 하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언을 예수님은 거침없이 선포하셨다. 그러기에 예수의 일꾼이 되려면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천들은 기존 질서와 체제, 관행과 풍토에 너무나 길들어져 있다.

그래서 자신도, 사회도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병든 사회를 치료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다. 교회가 지녀야 할 파괴력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칼막스(Marx, Karl)의 다음 말이 생각난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의 철학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나는 칼막스(Marx, Karl)의 이 말을 읽을 때마다 다음 같이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성경을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의 교회는 성경으로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런 생각, 이런 실천이 바로 예수의 일꾼들이 지녀야 할 파괴력이다.

 

예수의 좋은 일꾼(4)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예레미야 1장 9. 10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다섯 가지 요소를 골고루 갖추어야 함을 앞의 글들에서 언급하였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어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분명하여야 한다. 둘째는 병들고 삐뚤어진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무너뜨리겠다는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파괴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대안(Alternative)을 제시하여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건설하여 나가는 창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좋은 일꾼이 갖추어야 할 요소의 세 번째는 창조력이다. 파괴한 자리에 다시 세워 나가는 창조력에 대하여 예레미야서 1장에서 다음같이 일러 준다. 청년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일러 주시는 말씀이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무너뜨리고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예레미야 1장 10절)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예수의 일꾼들이 말씀의 능력으로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을 허물어 뜨리고 파괴한 후에 그 위에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건설하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새 역사, 새 가치관, 그리고 새 질서를 창출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의 좋은 일꾼들이 수행하여 나가야 할 창조력은 비판하고 무너뜨리는 데서 진일보하여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대를 일으켜 나가는 능력이다.

 

예수의 좋은 일꾼(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디모데전서 4장 15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분명한 신앙고백이다

둘째는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에 대항하는 파괴력이다.

셋째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관 그리고 새 시대, 새 역사를 건설하는 창조력이다.

넷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정열이다.

세상만사 다 그러하겠지만 예수님의 일에도 정열 있는 사람, 자신의 사명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이 쓰임 받는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마음이 없이 게으른 사람, 적당히 편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쓰임 받는 경우는 없다. 그런 사람은 세속 일에도 하나님의 일에도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자신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에 혼신의 정열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의 용기에 대하여 신학자 Paul Tillich가 명언을 남겼다.

'용기란 무엇인가? What is Courage? 용기란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하여 두 번째. 세 번째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크리스천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 일에 자신을 통째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한 용기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예수의 좋은 일꾼이다.

 

예수의 좋은 일꾼(6)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장 13~14절)

예수의 좋은 일꾼들은 어떤 일꾼들인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위에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너무나 낭비한다.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좋은 일꾼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를 알고,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최상의 조건에 처하여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를 못하고 자신이 처한 좋은 조건을 선용하지를 못한 체로 헛되이 인생을 낭비한다. 자신이 바라보고 나가야 할 푯대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꾼들은 다르다. 그들은 무엇을 하며 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분명히 알기에 나날의 삶이 새롭고 신바람 나고 그리고 보람되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자신을 훈련하고 절제하며 나 자신을 다스린다.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다.

 

예수의 좋은 일꾼(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장 25~27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먼저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하게 된다. 내가 30대에 청계천 빈민촌에서 빈민선교사역을 할 때다. 나는 청계천 하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청계천 중류 마장동 부근에서 정목사란 분이 역시 빈민선교사역을 하고 있었다. 대단히 유능한 분이었다. 교섭력이 있어서 서울시청에 들어가 구호품도 많이 받아와 주민들에게 나눠 주고 하니 지역에서 인기도 있었다.

그런데 지역 내에 미모의 무당이 한 분 있었다. 탤런트 급으로 미모가 빼어난 분이었다. 정목사가 그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한번은 주의를 준 적이 있다. "정형 그러다 그 무당에게 말려들어 탈선하게 되는 거 아니오. 조심하셔야 할 텐데…"하였더니 "아니 내가 전도하러 그 집에 자주 가는 거이지 예쁜 얼굴 보고 갈까?"하고 반문 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정목사는 그 무당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이 깨어지고 주민들로부터도 불신을 받아 선교지를 잃게 되었다.

결국은 노숙자 신세가 되더니 후에 오웅진 신부가 운영하는 동네로 가서 사는 처지로 떨어졌다. 내가 소식을 듣고 찾아가 "형님 여기에 있지 말고 두레마을로 갑시다. 목사가 어찌 신부 신세를 지고 있는 거요. 두레마을로 가서 함께 삽시다"고 권하였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김목사 고마워 그러나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 좀 세워줘. 내가 김목사의 두레마을에 가 있으면 왕년의 정 아무개가 두레마을에 엊혀 산다는 소문이 날 것 아냐. 여기에 있음 아무도 모르니 그냥 묻혀 살다 인생 끝내고 싶어"

아무리 이상이 높고 실천력이 뛰어나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사탄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우리 주위에 그런 일꾼들이 적지 않다. 한 때는 능력의 종으로 높임 받던 인물이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여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

 

예수의 좋은 일꾼(8)

 

 

나는 신학교 2학년 학생이던 때에 빈민선교를 시작하였다.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살며 복음전도를 하겠다’라고 신학교 동기생들에게 말하였더니, 너무 무모한 것 아니냐고 염려하였다. 큰 교회나 기업하는 크리스천의 재정후원을 확보하고 빈민촌으로 들어가야지 빈손으로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고 염려하였다. 그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 나는 저녁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묻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저녁마다 장로회신학대학 뒤편에 있는 아차산에 올라가 기도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러기를 일주일쯤 지난 후에 하루는 기도 중에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지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 고향은 경북 청송 후미진 산골이다. 어릴 때에 우리 집은 외갓집 행랑채에 살고 있었다. 외갓집은 부농이어서 머슴이 셋이나 있었다. 그런데 머슴들이 아침에 일 나갈 때면 외할머니께 와서 신고하였다. "오늘 나는 과수원으로 갑니다" "나는 못자리 판으로 갑니다" "나는 고추 밭으로 갑니다"라고 신고를 하고는 가서 일을 하면 할머니께서 외숙모를 시켜 때마다 마실 물과 식사를 제 때 제 때 챙겨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 중에 그 장면이 떠오르며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슴은 일터에 나가 일만 부지런히 하면 뒷바라지는 주인이 알아서 다 챙겨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예수님의 머슴이니 ‘나의 일터인 빈민촌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만 하면 먹을 것, 쓸 것 모든 것을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챙겨 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날로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글자 그대로 빈손으로 사명감 하나만 품고 들어갔다. 그 후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에 내가 생각하였던 것 보다 더 풍성히 채워 주셨다. ‘나는 오로지 머슴 노릇만 열심히 하면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때를 따라 챙겨 주실 것이다’라는 나의 믿음대로 이루어졌다. 아니 나의 믿음보다 더 넘치게 주셨다. 이런 마음가짐이 예수의 좋은 일꾼들이 지녀야 할 기본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좋은 일꾼(9)

 

요한복음 10장을 일컬어 목자장(牧者章)이라 일컫는다. 10장에서 3가지 종류의 목자를 일러 준다. 이들 3가지 종류의 목자들을 3가지 종류의 지도자라 생각해도 좋겠고 3가지 종류의 일꾼이라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첫째는 절도와 강도같은 목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와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한복음 10장 1,2절)

불행하게도 목사들 중에서도 절도와 강도같은 목사들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양무리를 수탈하고 이용하고 괴롭히는 목사들이다. 이런 일꾼들은 이름만 예수님의 일꾼이지 실상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리배에 준하는 일꾼들이다.

둘째는 삯꾼 목자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요한복음 10장 12절)

삯꾼 목사는 목사직이 직업이 되어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혹은 입신의 수단으로 목사 노릇을 하고 있는 일꾼들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의 목사들 중에 다수가 이 부류에 속하는 일꾼들이 아닐까 여겨진다.

셋째는 선한 목자 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요한복음 10장 11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기꺼이 버리는 목자이다. 선한 목자의 기준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의 좋은 일꾼은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양들인 신도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손해보고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일꾼이다.

 

예수의 좋은 일꾼(10)

 

사람들 중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다. 둘째는 현실영합적인 사람들이다. 셋째는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매여 있기에 미래가 열리지 못한다. 현실영합적인 사람들은 현실의 이권이나 지위에 안주하여 있기에 미래를 향하여 도전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려는 포부를 지닌 History Maker들은 당연히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는 과거지향적인 바리새인들. 그들은 항상 모세에 매여 모세가 무어라 하였느냐? 모세에 율법에는 무엇이라 가르쳤느냐?라고 하며, 이것이 모든 가치판단과 행동의 기준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미래역사에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둘째는 현실영합적인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이권과 지배를 독차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혁명적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셋째는 미래지향적인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학문이 없고 민초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이르셨다. 바로 미래를 향하여 자신의 삶을 던지라는 말씀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였기에 오늘의 기독교가 있을 수 있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르신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자신을 헌신하라' '세상을 변화시켜 새 역사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history maker가 되라'고 이르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좋은 일꾼은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예수의 좋은 일꾼이다.

 

(2012-02-22~03-07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