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Smart Lee 2013. 11. 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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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우리는 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존경하고 따르는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나도 그런 인물들이 있다. 그런 인물들을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4사람씩을 손꼽는다. 우리 역사의 인물로는 신라시대의 원효(元曉)스님,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장군, 비운의 석학 다산 정약용(茶山鄭若鎔), 그리고 도산 안창호(島山安昌浩)선생이다.

 

일본의 인물로는 250년 전에 요네자와 번에서 개혁운동에 성공하였던 정치가, 우에스기 요잔, 1886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장본인 사카모도 료마(坂本龍馬), 일본의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접합시킨 평신도 크리스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그리고 고베(神戶) 빈민굴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이다.

 

중국의 인물로는 약소국가 진(秦)나라가 강대국으로 가는 기초를 닦은 정치가 상앙(商怏), 춘추전국시대의 행동하는 사상가 묵자(墨者), 신중국건설의 기초를 놓은 손문(孫文) 그리고 모택동 시대의 문화혁명(文化革命)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중국의 기초를 닦은 등소평(登少平)이다.

 

이들 외에 아세아의 인물로는 베트남의 호지명(胡志明), 싱가폴의 이광요(李光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바울이라 불리는 전도자 산다싱, 그리고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등을 손꼽는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표(師標)가 될 위인이 필요하다. 그런 위인이 없는 시대나 나라는 불행하다. 그런 위인들이 있기에 젊은이들이 그를 본받아 살기를 다짐하고 뜻이 있는 인사들이 그런 위인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모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원효(1)

 

 

인터넷이네, 스마트-폰이네 하면서 온 세상이 속도를 더하여 가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깊이의 세계가 상실되고 있다. 빠르기만 하고 깊이가 없으면 마치 모래위에 지은 건물과 같아 위태하기 그지없게 된다. 그렇게 위태하게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 각종 성인병과 우울증, 청소년들의 인터넷 중독 등을 대표로 하는 현대병들이다.

 

이런 때에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깊이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에 인생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전체가 균형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1,500여 년 전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원효(元曉) 큰스님이다. 원효 선배가 있었기에 우리 겨레의 정신세계가 한 단계 더 깊어졌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역사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원효 큰 스님을 첫째로 손꼽는다. 내가 목사로써 원효 큰스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니 기독교계에서 가끔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에도 한 모임에서 원효 선배의 공덕을 높이는 발언을 하였더니 어느 목사가 ‘김진홍 스님 언제 불교로 개종(改宗)하셨나요?’하고 힐문하였다.

 

원효 큰스님은 617년 신라 진평왕 때에 태어났다. 그때는 신라에 불도(佛道)가 들어온 지 100년 남짓한 때였다. 한국의 개신교로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시기였다. 신라 불교는 100년 만에 원효 선배 같은 세계적인 학승(學僧)을 배출하였는데 한국교회는 지난 100년에 그에 버금가는 신학자나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점이 한국 개신교의 약점이자 부끄러운 점이다. 한국 개신교는 100년 역사에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성공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큰 교회 10교회 중에 8교회가 한국교회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덩치는 커졌지만 그 덩치에 깊이를 더하여 줄 세계적인 학자나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도 들은 원효 큰 스님 같은 겨레의 대선배를 배우고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원효(2)

 

 

십여 년 전 일본에 갔을 때다.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였는데 그 대학에 불교학과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과에서 사용하는 교재 중에 원효(元曉) 스님의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가워서 어떻게 1,500여 년 전에 살았던 한국 스님의 책을 교제로 사용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원효 스님의 저서는 세계 불교의 10대 저서 중에 손꼽힌다고 일러 주었다.

 

원효 스님이 세월이 흐르면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그가 생전에 일으킨 4가지 영향력 까닭이다.

첫째 그는 당시에 귀족들과 학자들의 수중에 있었던 불교를 대중화(大衆化)하여 민중불교(民衆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둘째 그는 마치 요즘 한국 기독교처럼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혼란을 일으키던 종파불교(宗派佛敎)를 하나로 묶어 통합불교(統合佛敎)를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셋째는 당시에 팽배하던 소승불교(小乘佛敎) 흐름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흐름으로 전환시킴에 기여하였다. 소승불교는 기독교로 말하자면 개인구원의 흐름이고 대승불교는 사회구원의 개념에 해당한다. 원효는 한국불교의 귀한 전통인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넷째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신의 주장과 사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늘 대국주의(大國主義)와 수입사상(輸入思想)에 안주하는 체질이 있다. 그러나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 가던 발길을 돌려 토굴에서 자습자학(自習自學)하여 유심사상(唯心思想)과 회통사상(會通思想)을 전개하여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세웠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3)

 

춘원 이광수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전기를 쓰면서 부제를 붙이기를 <겨레를 깨우친 영원한 선각자>라 표현하였다. 도산 선생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우리 근세사에 도산 선생 같으신 선각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도산 안창호(島山安昌浩) 선생은 1878년 대동강 연안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났다. 청국과 일본이 싸우는데 조선 백성들이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소년 안창호는 왜 청국, 일본 외국 군대가 우리 땅으로 들어와 전쟁을 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였다. 생각 끝에 한 결론을 얻었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이 생각이 도산의 생애를 결정지은 생각이 되었다. 그는 57세에 일본 경찰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생각한 것이 어떻게 하면 겨레의 힘을 기를까를 생각하였다. 그가 다른 선각자들과 달랐던 점은 겨레의 힘을 기르는 방략(方略)에서 달랐다.

 

같은 시대의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방략에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었다. 김구 선생은 무력항쟁에서 길을 찾았고, 이승만 박사는 외교로 조선독립을 이루려 하였다. 이승훈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 같은 분은 산업을 진흥시켜 겨레의 부력(富力)을 높여 자주독립의 길을 찾으려 하였고 김교신 성생은 바른 종교, 바른 신앙을 길러 민족자주독립의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일관되게 ‘인격의 힘’을 주창하였다. 조선이 진정한 자주 독립국가가 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인격을 길러 인격의 힘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다 주창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자신이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는 데에 전심을 다하였다. 도산 선생의 생전에 가까이서 모셨던 분들의 말에 의하면 선생은 인격적으로 거의 흠이 없는 어른이었다 한다.

 

그리고 선생은 함께 인격의 힘을 기르기 위한 신성한 조직으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결성하였고 흥사단(興士團)을 일으켰다. 요즘 들어 너 나 할 것 없이 도덕성이 흔들리고 인격의 힘을 잃은 때에 도산 선생 같으신 큰 어른이 더욱 간절하여진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4)

 

도산(島山)선생이 미국유학을 떠난 것은 25세 되던 해였다. 그때는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이 눈이 보이게 드러나던 때였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겨레의 힘을 길러야 한다. 겨레의 힘을 기르려면 국민교육을 통하여서이다. 바른 교육을 통하여 바른 정신을 지닌 국민을 길러나가는 것이 겨레의 힘을 기르는 기본이다."

 

이런 생각을 품은 선생은 선진교육을 배워 오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센 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선생이 시내를 돌아보는 중에 두 조선인이 길 한복판에서 서로 상투를 틀어쥐고 사우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 구경거리에 백인들이 손뼉을 치며 싸움구경을 즐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민족적인 수치심을 느낀 청년 도산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며 말했다.

"동포님들 나라는 왜적에게 먹힌 때에 어찌 이 멀고 먼 이국땅에 와서까지 싸움을 벌리시오?"

알고 보니 인삼행상을 하는 그들이 구역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싸움을 하게 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도산은 생각하기를 국민정신을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국민으로 바꾸기 전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도산은 다음 날부터 조선 동포들 한 사람 한 사람, 한 집 한 집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깨우치는 일에 헌신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몇 푼 벌면 술을 마시고 밤중에도 고성방가(高聲放歌)를 부르며 마당에 잔디도 깍지를 않아 풀이 무성하여 조선인들이 사는 집은 마치 흉가(兇家)와 같았다. 이에 도산 선생은 조선인들의 가정 가정을 방문하여 손수 잔디를 깎아주고, 페인트를 칠하고 커튼도 달아주며 대화를 통하여 민족정기(民族精氣)를 일깨워주고 일등시민(一等市民)이 되는 의식을 일깨우기에 힘썼다.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고 오해도 심하였으나 끝내는 선생의 진심을 알고는 조선인 사회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에나 민심(民心)은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앞장서서 희생하고 본을 보이면 처음에는 빈정거리기도 하고 반대도 하다가 진정성(眞情性)이 통하게 되면 결국은 인정하고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야말로 도산 선생 같은 인격의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이다.

 

(2013-02-05/11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