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안식하는 신앙

Smart Lee 2013. 11. 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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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하는 신앙(1)

한국인 남성 40대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통계가 있다. 그리고 40대 여성들의 우울증 역시 세계에서 한국이 제일 높다는 통계도 있다. 거기에다 중·고등학생 나이의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점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지난 해 날마다 43명의 청소년들이 자살로 꽃다운 삶을 마쳤다

 

왜 그럴까? 왜 이 나라에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고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 사회는 유달리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인 점이다. 과도한 스트레스 탓에 40대 남성들이 돌연사를 하고 40대 여성들이 우울증을 앓는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살을 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런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문제가 있으면 해결의 길 역시 있게 마련이다. 병이 있으면 약이 있기 마련이듯이 문제가 있으면 해결의 길 역시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위대한 책인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일러 주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일러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은 11장 28절의 말씀이다. 스트레스에 지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의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이 말씀을 약간 고쳐 읽곤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십시요. 내가 여러분에게 쉼을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쉼과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 신앙이 위대하고, 종교가 값진 것은 그 신앙을 믿고 그 종교를 따르는 자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을 누리게 해주고,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점에서 성경은 위대한 책이다. 성경에는 시작하는 창세기로부터 마치는 요한계시록까지 안식의 메시지가 가득하다. 성경에는 7가지 안식이 있다.

 

안식하는 신앙(2)

 

< 여호와의 안식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세기 2장 2, 3절)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의 첫 번째는 여호와의 안식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창조 작업을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시지도 않으셨을 텐데 왜 안식하셨을까?

창세기 1장 1절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창조하다"는 단어는 BARA이다. BARA란 히브리어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첫째는 아기를 낳는 산모가 "출산하다"에 사용된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다"에 사용된다. 산모가 아기를 출산할 때에 얼마나 수고하여 출산하는가? 출산의 고통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통 중에 아기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걸쳐 창조 작업을 진행하시던 때에 하루하루, 한 단계 한 단계, 창조가 진행되면서 마치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던 때와 같은 수고를 치르시며 창조하셨다.

그래서 엿새 동안의 창조 작업이 끝난 후에 일곱째 되던 날에는 안식하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안식 하시며 그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복된 날로 정하셨다. 바로 기독교에서 지금까지 지켜 오는 7일째 안식일의 시작이다.

 

지구상에는 숱한 종교가 있고 경전이 있지만, 성경에서처럼 일곱째 날마다 철저하게 안식을 취하는 경전이나 종교는 없다.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주일 안식의 시작은 여호와의 안식에서 시작 되었다. 여호와의 안식이 엿새 동안의 창조 작업을 마치신 후에 안식하심에서 시작되었으니, 지금 우리가 지키는 안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엿새 동안의 노동에서, 사회적 책임에서, 이런저런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 날에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안식하는 신앙(3)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날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급기 20장 8절~11절)

 

안식일 지키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해방되어 홍해바다를 건너 시내산 기슭에 당도한 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10계명 중에 4번째 계명이다. 10계명 중에서 가장 긴 설명이 붙은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10계명 중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넣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안식일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안식일 지키기를 그렇게 강조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철저하게 쉬는 날이다. 먼저 노동에서 벗어나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고,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해방되어 하루를 완전히 쉬는 날이 안식일이다. 말하자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감에 꼭 필요한 조건이기에 제정하신 것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안식일 지키기에 들어 있는 셈이다.

 

안식일 지키기를 일러 준 출애급기 20장의 본문에서는 안식일을 일컫기를 “여호와의 날”이니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였다. 굳이 “여호와의 날”이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날”이라면 사람들이 쉬어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되겠지만, “여호와의 날”이기에 사람들의 의도나 편의에 관계없이 절대로 안식하여야 한다.

 

“여호와의 날”이기에 사람들의 사정에 관계없이 무조건 쉬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 지키기를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던지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인간생리학과 심리학에서의 발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엿새 동안에 일하고 칠일 째는 쉬는 것이 인간의 신체리듬에 가장 이상적이라 한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한 후 안식일 지키기가 부르주아들이 정한 헛된 규정이라 여겨 폐지하였다. 그러나 그 피해가 점차 드러나 결국은 칠일마다 쉬는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의 DNA속에 엿새는 일하고 칠일 째는 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입력이 되어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주신 복을 누리는 삶이 된다.

 

안식하는 신앙(4)

 

< 가정의 안식 >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기 3장 1절)

 

구약성경 속의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4장으로 이루어진 단편에 해당하는 글이지만 그 내용으로나 문체로나 단편문학의 최고수준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내용이다. 사사시대는 소위 무정부시대였다. 힘 있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판을 치고 힘없는 민초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하였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에도 역시 흐뭇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었다.

 

예수님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나오미란 여인이 있었다. 베들레헴 마을에서 살았으나 흉년이 들어 살길을 찾아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사 가서 살았다. 그러나 타향살이 10년간에 액운이 연거푸 닥쳐 남편과 두 아들이 연달아 죽고 청상과부 두 며느리만 남았다.

 

이에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기로 하고 두 며느리에게 일렀다. 늙은 나를 따라와서는 장래가 없다.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안식할 길을 찾으라고 권하였다. 이에 큰 며느리는 울며 헤어져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둘째 며느리 룻은 한사코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노후를 봉양하며 살겠노라 하였다.

 

이에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은 타향살이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하였다.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온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로 안식할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야겠노라”하고는 며느리에게 재혼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가정을 이루게 된 남편이 보아스란 인물이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다윗 왕의 할아버지 격이 되는 오벳이 태어났다.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예수님의 족보를 밝혀 주는 룻기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안식할 곳을 이루는 것으로 말해 준다. 가정은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안식을 누리는 자리이다.

 

세월이 험하여지고 살아가기가 벅차게 될수록 가정은 더욱 소중하여진다. 살아가기가 힘이 들수록 "안식을 누릴 자리 가정"이 소중케 된다. 그래서 가정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된다. "가정의 안식"을 말해주는 룻기는 가정이 흔들리고 있는 우리시대에 더 없이 소중한 책이다.

 

안식하는 신앙(5)

 

< 토지의 안식 >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레위기 25장 1절~4절)

 

공산주의의 경제는 노동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의 경제는 자본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성경의 경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토지라 하면 농지, 대지, 산지를 합하여 토지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토지라 할 때는 농지를 일컫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한 후 땀 흘리고 피 흘리며 땅을 점령하였다.

 

그렇게 점령한 땅을 지파 별로 분배하였다. 유다 지파는 이 벌판, 요셉지파는 저 산지, 베냐민 지파는 저 골짜기 식으로 배정하였다. 그리고 지파 안에서는 지파에 속한 가정 수를 따라 바둑판처럼 땅을 구분한 후에 제비를 뽑아 주인을 정하였다. 그렇게 각 가정에서 제비뽑기로 분배된 토지를 기업이라 하였다. 중소기업 할 때의 기업이 아니다. 기초(基礎)라 할 때의 기업(基業)이다. 영어로는 LOT이라 한다.

 

이렇게 배정된 기업으로써의 토지를 육년 동안은 수확을 하고 칠년이 되면 반드시 경작을 멈추고 땅이 쉬게 하였다. 이른바 토지의 안식이다. 토지의 안식을 강조하여 성경에서 이르기를 “그 토지가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하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이 토지의 안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일 년간 토지가 안식을 하는 동안에 지력을 회복한다.

 

토지가 안식을 누리는 일 년 동안에 토양 미생물들이 번식케 되고 지렁이가 자라면서 토지가 비옥하게 된다. 그래서 토지가 젊어지고 지력이 회복되어 다음 해부터 생산성이 높아진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종교의 경전에도 “토지의 안식”같은 개념이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에만 등장하는 탁월한 제도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좋고 성경을 사랑한다.

안식하는 신앙(6)

 

 

< 공동체의 안식 >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위기 25장 10, 11절)

 

레위기 25장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없는 특이한 제도가 나온다. 50년째 해를 맞이할 때마다 공동체 전체가 일 년간 안식으로 들어가는 제도이다. 이 해를 희년이라 하여 기쁨의 해, 나팔의 해라고도 한다. 나팔의 해라 부르는 것은 희년을 시작하는 나팔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지면 마을마다 가정마다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일 년간 축제로 들어간다.

 

나팔을 히브리어로 YOBEL이라 하기에 The Year of YOBEL이라 부른다. 희년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온 나라에 먼저 자유가 선포된다. 그러면 그 자유의 내용으로 두 가지가 실시된다.

첫째는 그간에 주인이 바뀌었던 토지들이 모두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평등경제가 이루어진다. 성경의 토지제도는 원래 토지를 사고파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토지의 주인은 토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시요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이기에 하나님이 주인인 그 토지를 사고파는 매매행위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가정사정이 긴급한 경우 그 토지의 경작권을 일시적으로 양도할 수는 있다. 토지 경작권을 양도하였다가 돈이 생기면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를 토지무르기라 한다. 그러나 되무를 여유가 없었던 경우에는 50년마다 오는 희년이 오면 무조건 원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둘째는 감옥 살던 사람, 종살이 하던 사람들도 희년 나팔소리가 울러 퍼지면 자유를 얻어 가정으로 돌아간다. 일컬어 자유의 정치라 할 수 있겠다. 희년에는 그렇게 토지가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평등경제가 이루어지고 옥살이,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자유의 정치가 이루어진다.

 

셋째는 희년 나팔소리와 함께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 년간 축제를 벌이며 안식을 누리게 된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희년제도를 지켰을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온 나라가 평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며 희년제도를 무시하였을 때에 평화가 깨어지고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들게 되었다. 희년제도가 백성들과 나라의 안식을 지켜 주는 안전판이었다.

 

안식하는 신앙(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태복음 11장 28, 29절)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던 때까지 방황이 심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공부가 하기 싫고 세상만사가 시들하기만 하여 무전여행을 떠났다. 윗주머니에 칫솔 한 개 꽂고 헬만 헤세의 시집을 들고는 여행을 떠나 마치 김삿갓처럼 이곳저곳을 다니기를 일 년 반을 보냈다.

 

다행히 일 년 반만에 마음을 잡고 집으로 들어와 다시 공부를 하여 2년 뒤에 대학을 들어갔다. 그러느라 고등학생 시절이 5년이나 걸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방랑 끼가 사라지지를 못하였다. 더욱이 철학과여서 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방황케 되었다. 3대째 예수를 믿는 모태신앙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고 한 때는 불교연구에 심취하였다가 이런저런 철학이론에 빠져들곤 하며 종잡을 수 없이 방황하였다.

 

그러느라 건강을 해쳐 불면증과 위장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불면증이 심하여 날마다 새벽 4시는 지나야 잠이 들곤 하였다. 위장병이 심하여져 6개월이 넘도록 죽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 여름 날 생각하기를 “내가 젊은 나이에 이런 병으로 시달리며 내 귀한 젊은 날을 허비하여서 되겠느냐. 내가 분발하여 예수님과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담요 한 장을 들고 대구에서 시외로 나가는 버스를 무조건 탔다. 타고 보니 청도 가는 버스였다.

 

청도 종점에 내려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더니 운문사(雲門寺)라는 한 절이 나왔다. 구름으로 들어가는 문이란 이름이 맘에 들어 운문사 뒤편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들어갔다. 한 곳에 다다르러 소나무 아래 판판한 바위가 있기에 그 바위에 담요를 갈고 앉아 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시도시여 당신이 정말로 계신다면 이 자리에서 나에게 나타나 주시옵소서! 당신이 계신다는 확증을 얻게 되면 나는 무조건 당신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3일간 계속하였다. 목이 마르면 골짜기로 내려가 물을 마시고 물 마신 후에는 제자리로 돌아와 그렇게 기도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그러기를 3일이 지난 날 새벽 3시경에 황홀한 체험에 휩쓸리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로 다가오시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다. 감사와 기쁨에 넘친 나는 그 자리에서 춤을 추고 손뼉 치며 찬송 부르기를 계속하다가 날이 밝은 후 청도읍으로 내려왔다.

 

중국식당으로 들어가 우동 곱빼기를 시켜 먹었다. 위장병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뒤로 지금가지 위장병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게 되면 예수 안에 있는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내 젊은 날의 체험이 그 산 증거이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안식하는 신앙(8)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장 5, 6절)

 

기독교 신앙은 신비(神祕)다 신비주의가 아니고 신비 자체이다. 왜 신비인가? 우리가 지금 2013년에 한국 땅에 살고 있는데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때에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고 또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실 때에 함께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에베소서 2장에서의 말씀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 구원을 받은 후에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우리가 땅 위에 살아가고 있는데 하늘에 앉아 있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땅의 자녀로 태어났으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하였다는 것이다. 땅의 자녀로 있었던 때는 허물과 죄, 방황과 고뇌, 스트레스와 갈등 속에서 영혼도 마음도 몸도 쉼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었지만, 이제 하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안식을 누리고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 자매 한 분이 있었다. 겉보기로는 부러울 것이 없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우울증 탓으로 자살하고픈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처지였다. 같은 교회에 속하여 있었어도 아무도 그런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의 딸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저의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너무나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목사님이 좀 도와주세요."하고 청하였다.

 

나는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그녀를 강대상 위로 불러 꿇어앉게 하고는 두 손을 함께 잡은 채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 드렸다. "예수님께서 이 딸에게 하늘로부터 임하는 안식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우울증에서 벗어나 하늘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드렸다. 기도드리는 중에 흐느껴 울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실컷 울도록 두었다. 그냥 곁에서 기도로 도와 드리며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냥 두었다. 반시간 가량이나 울고 나더니 그 후로 우울증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드디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게 된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늘의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안식하는 신앙(9)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여호수아 21장 44절)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데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브리서 3장 18, 19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장 8~11절)

 

BC 14세기 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제국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모세란 지도자가 나타나 그들로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이집트에서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후 40년에 걸친 시나이 사막에서의 방황을 거쳐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을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이라고 여호수아서에서 일러 준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길게 누리지 못하였다.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부패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등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복을 스스로 잃게 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 히브리서 4장에서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상들이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미처 누리지 못하였기에 우리들이 누릴 안식의 몫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누리지 못하였기에 우리들이 누릴 안식의 복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주어진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기에 남겨진 안식을 누리는 삶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그 남은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힘써서 그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은 주신 안식을 누리게 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안식을 잃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함으로 그 안식을 잃게 된 것이고 우리는 순종함으로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안식하는 신앙(10)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이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4장 13절)

 

안식하는 신앙의 최후 최종의 목표는 천국에서의 안식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꿈에도 그리는 영원한 안식이다. 위에 인용한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모든 이들이 누리게 되는 안식의 복을 일러준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치르는 모든 수고와 희생을 마치고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안식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다음같이 일러준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3절 4절)

 

나는 41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해방 되던 해에 나는 다섯 살이었다. 형님은 9살이었다. 나는 다섯 살이었기에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나 형님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일본 아이들은 이지매, (왕따)가 심하다. 일본 아이들로부터 심한 이지매를 당한 형은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 자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에 정신질환이 나타났다. 정신불열증이란 병이었다. 그 후 10년간 우리 집안은 병든 형님을 뒷바라지 하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그런데 그 형님이 숨을 거두던 때다. 숨 거두기 10분 전부터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천사 같은 얼굴로 변하였다. 형님은 감격에 넘치는 얼굴로 웃음을 띠며 말하였다.

"동생들 나 예수님 나라로 간다. 동생들 고마워. 내가 땅에선 동생들 신세를 못 갚아도 예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께 동생들 뒤를 봐달라고 부탁드릴게"

 

그 말을 남기며 행복이 넘치는 얼굴로 형님이 숨을 거두었다. 형님은 앉은 채로 손을 앞으로 내 밀며 "야, 예수님이 마중 나오시네"하며 행복한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내가 받은 감격과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못한다. 나의 형님이 먼저 가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천국을 오늘도 그리며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다가오는 천국의 안식을 그리며 땅에서 열심히 사람답게, 사는 삶이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2013-06-15/26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