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

Smart Lee 2013. 11. 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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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1)

우찌무라 간죠(内村鑑三)는 일본이 낳은 위대한 크리스천이다. 최근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로 일본을 현대화시킴에 공로를 끼친 인물 20명을 뽑으면서, 우찌무라 간죠를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를 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하며, 연전연승을 거듭 할 때에 전 일본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하던 때에 홀로 말하였다.



"일본이 동양의 평화에 기여하여야지 지금처럼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그 백성들을 괴롭히면 하나님께서 일본 하늘에 불벼락을 내리실 것이다. 일본이 지금 할 일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회개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비국민이라 핍박당하고, 직장인 제일고보 교사직에서 추방 되었다.

 

할일이 없어진 그는 동경의 자신의 집 6평짜리 방에 청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전쟁에 패한 후의일본을 건설할 일꾼들을 성경의 진리로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 앞에 세울 묘비명을 스스로 적어 남겼다. 지금도 동경 부근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쓴 그의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나는 일본의 나이다
일본은 그리스도의 일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I for Japan
Japan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 글은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글에서 따온 글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린도전서 3장 22, 23절)

 

우찌무라 간죠 선생이 말하였듯이 복음에는 국경이 없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섬겨야 할 조국이 있다. 미국 크리스천은 미국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일본 크리스천은 일본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마찬가지로 한국 크리스천은 한국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은 항상 함께 가야 한다. 진실한 크리스천들은 항상 애국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2)

 

일본의 선각자 우찌무라 간죠(内村鑑三)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주의를 비판하여 직장에서 쫓겨난 후, 동경 시내의 6평짜리 다다미방에 젊은이들을 모으고 성경공부를 할 때다. 동경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 중에 그의 성경공부반에 속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삼안, 유인성 등 20대의 조선인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현실을 기분강개하며 성서의 진리로 조선을 다시 세우자는 <성서조선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운동을 펼쳤다. 그들 중에 대표 격인 인물이 김교신(金敎臣)선생이다. 김교신 선생은 1921년부터 우찌무라 간죠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스승의 영향을 받으며 "도탄에 빠진 조선민족을 여하히 성서의 진리 위에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1927년 1월부터 "조선성서연구회"란 모임을 만들고 매주 한 차례씩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열었다. 그들은 "조선을 성서위에 세운다"는 확고한 비전을 품고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1927년 7월부터 "성서조선"이란 제목으로 월간지를 창간하였다.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에서 김교신 선생이 다음 같이 쓰고 있다.

"걱정을 같이하고 한 곳에 소망을 두는 어리석은 5~6인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촌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지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를 기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온 지 반년 남짓하여, 누군가가 동의하여 그간의 소원이던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고하고자 하여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고 하게 되었다.



...다만 우리의 마음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고의 선물은 “성서”1권뿐이니 양자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이 이름이었다.

....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국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의 혼을 소유한 조선인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아 너의 창간일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동지를 한 세기 후에 구한들 무엇을 한탄할 손가"(1927년 7월, 창간호)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3)

 

대한민국의 첫 국회를 제헌의회라 한다. 1948년 5월 31일에 제헌의회가 열렸다. 의회의 첫 순서가 임시의장을 뽑는 순서였다. 임시의장으로 뽑힌 분이 감리교 장로이신 이승만 박사였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첫 발언이 < 신생독립 국가 대한민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라는 발언이었다.

 

이어서 말하기를 < 이윤영 의원께서 단상에 올라오셔서 감사기도 드리겠습니다. >고 하였다. 이윤영 의원은 목사이면서 국회의원이었다. 그 날 이윤영 의원의 기도내용이 국회의사록에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국회도서관에 가서 이윤영 의원의 기도문을 옮겨 적으면서 가슴에 큰 감동이 있었다. 이윤영 목사님의 기도하신 내용이 감동적인 내용이기도 하였지만, 이 정부가 세워진 첫 국회 첫 순서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첫 국회였던지라 의원들 중에는 유학자, 불제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윤영 목사가 기도드릴 때에 의원 전원이 자발적으로 기립하여 기도에 동참하였다고 전해진다. 요즘 들어 종교편향이란 말이 나왔지 그 시절에는 그런 말조차 없었다. 국회의원 모두가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기에 이 나라는 기도로 시작된 나라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의사록이 기도문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뜻 깊은 사실인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통치과정에 어두운 그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를 건국할 때에 분명한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세우겠다는 목표였다. 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였다.

둘째는 이 나라를 기독교적 가치관 위에 세우겠다는 목표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한국교회가 그런 비전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를 못하였다. 이승만 장로는 여러 가지 과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중에는 하나님사랑과 겨레사랑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4)

 

오늘은 김구선생 이야기를 하겠다. 김구선생은 젊은 날 한 때 동학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었고, 동학민중혁명이 실패한 후에는 산사(山寺)에 피신하여 있는 동안 불도(佛道)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를 죽인 일로 사형선고를 받고 제물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크리스천이 되었다.

 

김구선생은 옥중에서 크리스천이 된 이후, 긴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에서도 신심(身心)의 뿌리를 잃지 않고 지켜 나갔다. 선생은 1945년 해방이 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귀국한 후 경교장에서 살았다. 선생은 경교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그날 새벽까지 하루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날마다 새벽에 기도회를 가진 후 국사에 임하곤 하였다. 그가 1945년 11월에 대중 앞에서 연설한 연설문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의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들어 있다.

"애국 동지 여러분, 앞으로 세워질 대한민국은 기독교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제 세워질 새 나라에서는 경찰서 10개를 짓는 것보다 예배당 하나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선생의 후배인 우리들은 이런 신앙과 신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선배들의 신앙과 얼을 우리가 제대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어제 글에서 소개한 이승만 박사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김구 선생 역시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 <예수사랑과 동포사랑>을 한 가슴, 한 비전으로 품고 있었다.

 

지금 우리들은 선배들의 신앙과 경륜에 비하면 너무나 왜소한 소인배의 모습이다. 기껏해야 자기 교회, 자기 교파의 울타리에 매여 민족경영과 국가경영에 큰 비전을 지니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나마 우리 모두가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선배들의 신앙과 경륜을 이어갈 수 있어야겠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5)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때에 조선에서 개신교 신도들은 불과 4%도 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개신교 신도였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선배들은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한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였고, 겨레를 사랑하는 일에 목숨까지 던질 애국심을 지닌 사람들이였다는걸 알 수 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들을 지도로 살펴보면 75%이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족 지도자들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불과 40일 후인 4월 10일에 중국 상해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임시정부수립을 논의하였다. 그때 선포한 선언문에 다음 같은 구절이 있다. 선배들의 신앙과 경륜이 그대로 들어나는 내용이기에 옮겨 적는다.

"오등은 조선반도에 신국( 神國, 하나님의 나라 )을 건설코자 하였다."

풀어 설명하자면 우리들의 선배들은 3·1만세운동을 일으키면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독립하려는 데에 머물지를 않고, 조선반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비전과 경륜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선배들의 비전과 경륜에 비하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나 왜소한 소인배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 한국 크리스천들은 모름지기 선배들의 그런 신앙심과 애국심, 호연지기와 민족경륜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선각자 우찌무라 간죠 선생이 말하였던 것처럼 “복음에는 국경이 없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섬겨야 할 조국이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목숨까지 바칠 정도의 뜨거운 하나님 사랑의 심장으로 겨레와 동포를 사랑할 줄 아는 국적 있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6)

 

한국교회사와 현대사에서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삶으로 보여 준 대표적인 인물이 남강 이승훈 장로이다. 이승훈 장로는 빈농의 자녀로 태어나 13살에 놋그릇을 파는 유기상점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실히 일하다가 훗날 자립하여, 평양에서 유기상으로 큰 성공을 하였다.

이승훈 장로가 크리스천이 된 계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의를 듣고 나서이다. 평양 모란봉의 쾌재정에서 열린 30대 초반의 청년 도산 선생의 민족사랑에 대한 열변을 들은 선생은 크게 감동하여, 그날로 예수 믿기로 하고 상투를 자르고 고향 오산으로 내려가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학교가 오산학교(五山學校)이다.

오산학교는 일제시대 민족진영의 기라성 같은 애국적 크리스천들을 배출하였다. 조만식 장로, 함석헌 선생, 이광수 선생 등이 오산학교와 관계있었던 인재들이다. 남강 이승훈 장로의 삶에 영향을 받아 오산마을은 주민 전체가 크리스천이 되었다. 주일이 되면 마을 전체가 농사일을 멈추고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수주일을 지키는 마을이 되었다.

남강 이승훈 장로는 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세 가지를 주창하면서 몸소 실천하였다.

첫째는 신앙입국이다
둘째는 교육입국이다.
셋째는 산업입국이다.

신앙입국을 위하여 자신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온 마을이 크리스천이 되게 하면서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교육입국을 위하여 오산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학생들에게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을 펼치며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교육을 통하여 구현하려 하였다.

산업입국을 위하여 기업을 세우고 백성들이 자주 자립하는 경제를 통하여 독립국이 될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세우려 하였다.

우리 겨레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던 시절에 남강 이승훈 장로 같은 선배가 있었단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런 선배들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 번영하는 통일한국시대를 열어 세계에 우뚝 솟는 코리아를 세워나갈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

 

아침묵상 제목과 날짜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7)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평생토록 실천하려 하였던 선각자는 도산 안창호( 島山 安昌浩 ) 선생이다. 도산 선생은 신앙과 인격의 힘으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1878년 평안남도 한 섬에서 태어난 선생은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 16세 되던 해에 서울 새문안교회 안에 세워진 구세학당( 救世學堂, 후에 경신학교 )에 입학하면서 크리스천이 되었다.

1902년 24세에 결혼을 한 후 교육을 배워 조국을 교육으로 새롭게 하겠노라는 < 교육입국 >에의 뜻을 품고 교육선진국인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려 숙소를 정한 후 시내를 구경하던 중에 길거리에서 조선인 둘이 서로 상투를 잡고 닭싸움하듯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박수를 치며 싸움구경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민족적 수치심을 느껴 싸움을 말리며 물었다.

"동포님들 조국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흔들리고 있는 때에 멀고 먼 타향까지 와서 왜 동포들끼리 싸우고 있습니까?"

싸움의 원인을 알고 보니 인삼장수들인데 구역침입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선생은 동포들을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이 동포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국민교육이 먼저임을 깨닫고, 동포들 한 가정 한 가정을 방문하며 섬기고 설득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각 가정을 돌아보며 잔디를 깎아주고 커튼을 달아주며 페인트칠을 하는 등으로 집단장을 해주며 무질서한 동포들의 생활을 고치려 힘썼다.

하루는 아편중독자들의 소굴을 방문하던 중에 한 조선인 동포가 중독되어 아편굴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그를 업고 집으로 데려와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면서 날마다 그를 위하여 기도 드렸다. 도산 선생 부부의 정성에 감동된 그는 마침내 아편을 끊고 건강한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 평생토록 도산선생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26세 되던 해에 영어와 신학을 공부하며 한인친목회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로스앤젤레스 부근인 오클랜드로 옮겨온 선생은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하고 있는 동포들의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접하고는 안타까워하며, 동포노동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오렌지 하나 따는 것도 독립 운동하는 마음으로 하자고 설득하였다. 지금도 오클랜드 시 중심가에는 시 정부에서 세운 도산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8)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에서 60여마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클랜드시가 나온다. 오클랜드 시에는 도산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한국인들이 지은 집이 아니다. 백인들이 도산 선생을 기리며 지은 집이다. 기념관에서 팔고 있는 기념품 중에 오렌지 무늬가 있는 넥타이가 있다. 몇 해 전 내가 기념관을 방문하였을 때에 안내한 백인 여성이 설명해 주었다. 오렌지 밭에서 노동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극진히 돌보고, 그들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한 도산 선생의 공적을 기려서 오렌지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제작하였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그 넥타이를 몇 개 구입하여 와서 번갈아 매곤 한다. 특히 젊은이들 상대로 강의를 나갈 때면 그 넥타이를 매고 가서 젊은이들에게 우리 선배의 고귀한 생각과 삶을 일러 주곤 한다.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 노동자들은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 노동자들의 감독자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감독자는 조선인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며 '미국 땅에서도 조센징은 어절 수 없는 인종들이다'라고 구박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나타난 20대 후반의 지도자 도산은 동포 노동자들에게 오렌지 하나를 따도 독립 운동하는 마음가짐으로 따야 한다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설득하였다. 도산 선생에게 감화(感化)를 받은 조선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 부지런하여지고 깨끗하여졌다.

이를 지켜 본 미국인 농장주가 하루는 물었다.

"너희 민족이 본국에서 지도자가 왔느냐? 너희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니 본국에서 지도자가 온 것 같다"

한 조선인 노동자가 답하기를 "그렇다. 본국에서 Mr.Ahn이란 지도자가 왔다."고 답하였다. 이에 농장주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한번 만나고 싶으니 소개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 조선 노동자의 소개로 농장주와 도산 선생이 만났다. 만나보니 20대의 청년인지라 백인 농장주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당신 같은 젊은이가 조선인 지도자냐!” 도산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지도자가 아니라 동포들을 섬기는 사람이라 하였다. 도산과 대화를 나눈 후 농장주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 민족을 돕고 싶다.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하였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9)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인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곁에서 본 오렌지 밭 농장주가 도산 선생께 제안하기를 내가 당신네 민족을 도울 테니 무엇을 도울지 말해 주라 하였다. 이에 도산 선생이 현금 2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농장주가 묻기를 어디에 쓰려는가 하고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Korean Center로 집 한 채를 빌려 낮 동안에 노동한 한인노동자들에게 밤에는 영어와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고 주일에는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겠노라 하였다.

오렌지 밭 농장주가 기꺼이 2만 달러를 빌려 주었다. 그런데 도산 선생은 그 돈 2만 달러를 한 달 만에 갚았다. 도산 선생의 동포사랑, 겨레사랑의 열정에 감동하고 성경을 접하면서 눈이 열린 조선 노동자들이 모두 힘을 모아 돈을 마련하여 갚은 것이다. 한 사람의 선각자가 삶에서 보인 열정과 본이 대중을 움직일 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이 그 후로 계속하여 조선독립운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한 때는 중국에 있는 상해임시정부의 예산 절반 이상을 미국의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본래 우리 Korean들은 신바람이 나면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정도로 가능성이 있는 국민들이다. 다만 그렇게 신뢰를 얻고 비전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아까운 가능성을 묻혀 두고 있을 따름이다. 도산 선생은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의 기초 위에 뜨거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하여 대중에게 신뢰를 주고 대중의 잠재된 능력을 현실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 농장주는 그 후로 도산 선생에게 아예 백지 수표책을 맡기고 도산 선생께서 펼치는 운동에 필요한 만큼 쓰라고 하였다. 도산 선생은 곡 필요한 공적인 일에만 그 수표책을 사용하다가 중국으로 갈 일이 있어 출국할 때에 농장주를 찾아가 아직 사용하지 않은 수표책을 반환하였다. 농장주가 그냥 지닌 체 앞으로 계속 사용하라 하였을 때에 선생께서 말하였다.

“내가 먼 나라에 가는 몸이라 혹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당신께 신용을 지킬 수 없을지 모르기에 반환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선배 도산 선생으로부터 이런 정직함과 경우 바른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성직자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이런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겠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1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애굽기 32장 30절~32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땅의 오랜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던 때이다. 도중에 시내산 기슭에 머물게 되었다. 백성들은 산기슭에 머물고 지도자 모세는 시내산 위로 올라가 40일간 하나님과 교제하며 십계명을 받아 산 아래 백성들에게로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40일을 참지 못하고 금붙이를 거두어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우리들이 섬길 신이다’하며 섬기고 있었다. 기가 막힌 모세는 받아오던 십계명 돌 판을 팽개치고는 "너희가 용서 받지 못할 큰 죄를 범하였다.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느냐!"하면서 여호와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탄원하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모세는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대신에 섬기려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탄원하며 하나님께 아뢰었다.

“슬프도소이다 하나님 백성들이 자신을 위하여 금신을 만든 이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만일에 이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시고 멸망시키시려거든 나도 이들과 함께 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백성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망하게 하시려거든 하늘나라의 구원 받은 백성들의 이름을 적은 책인 생명책에서 내 이름도 제하여 주시옵소서”

모세의 이 기도야말로 그의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함께 보여 주는 기도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과 겨레를 위한 애국심이 하나로 맺어진 지도자였다. 그에게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모세의 신앙심과 애국심이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은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하여야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1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로마서 9장 1~4절)

모세가 그러하였듯이 바울 역시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한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지자로 자처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주 대상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이라 하여, 조국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하였던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로마서 9장의 말씀에서 그는 분명히 말한다.

"내게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고통이 있다. 바로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근심이요 고통이다. 나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게 된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다"

이 말씀에서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하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 받게 된다면 자신은 예수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좋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극진한 겨레사랑인가! 모세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하나님 사랑과 동포사랑은 하나로 연결된 사랑이었다. 어느 한 편만을 택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장 1~3절)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음에도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과 동족을 향한 애국심을 한 가슴에 품고 있었다.

(2013-09-25~10-22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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