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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리콴유 국장 참석..'조문 외교' 펼쳐

Smart Lee 2015. 3. 30. 21:38

박 대통령, 리콴유 국장 참석..'조문 외교' 펼쳐

[앵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의 장례식이 어제(29일) 엄수됐습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해외 지도자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하면서 조문 외교를 펼쳤습니다.현지에서 윤석이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국가 장례식.

소박한 삶을 살았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장례도 간소하게 진행됐습니다.

장남인 리셴룽 현 총리와 전현직 각료 등 각계 대표의 조사에 이어 가족 헌화, 묵념, 국가 연주 순으로 1시간 반 가량 엄수됐습니다.

<리셴룽 총리> "선친의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싱가포르가 자신의 사후에도 지속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일이었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가장 힘든 일은 권력승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15년만에 해외 지도자의 국가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시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조문록에 '리 전 총리는 이 시대의 기념비적인 리더로 그의 이름은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장례식장에 모인 다른 정상들과 자연스럽게 만나 조문 외교도 펼쳤습니다.

리 전 총리의 장례식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토니 애벗 호주 총리, 리 위안 차오 중국 부주석,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정상급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앞서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을 비롯해 미얀마 세인 대통령 등과 환담을 나눴습니다.

장례식 뒤에는 싱가포르 토니 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정부 대표 리셉션에서 각국 정상들과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리콴유 전 총리와 각별한 인연을 쌓아온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 최고의 외교적 예우를 표시했습니다.

세계 각국 정상들과도 만남을 갖고 조용하지만 치열한 조문외교를 펼쳤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연합뉴스 tv 윤석이 입니다.

 (2015-03-30 연합뉴스TV 왕지웅) 

 

靑 "조문외교로 각국 정상들과 신뢰·유대 강화"

 

박근혜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싱가포르 시내에 위치한 싱가포르 국립대학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가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2015.03.29.(사진=싱가포르 정보통신부 제공) photo@newsis.com 2015-03-29

박 대통령은 일본, 중국, 미국, 호주 등 주요국 정상급 인사들과 주요 관심 사안에 대한 의견교환의 기회도 가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경우 한·일·중 외교장관회의의 성공적 개최에 사의를 표명하고 우리의 의장국 역할을 평가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외교장관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필요한 조치를 잘 취해 나가자"고 언급했다.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부주석과는 최근 가서명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대화 주제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우리의 AIIB 참석 배경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와도 최근 두 나라 간 AIIB 참여 결정 과정에서의 긴밀한 협의에 대한 평가가 오갔다고 주 수석은 전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톰 도닐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국 측 인사들과는 한미동맹의 중요성, 광복 70주년 및 분단 70년인 올해 우리나라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 질서구축을 위한 노력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주 수석은 "미국 측 인사들은 앞으로도 한미동맹의 발전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급했다"며 "특히 키신저 전 장관은 '과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묘역도 직접 방문했다'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주 수석은 리 전 총리의 리더십과 일관된 국가발전 전략이 싱가포르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이번 국장 참석을 통해 우리나라의 발전전략, 특히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창조경제 중심의 신국가발전 전략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추진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부패척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반부패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에게 있어서도 오늘날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15-03-30 서울=뉴시스 김영욱 기자】

 

박 대통령-리콴유 전 총리, 대 이은 ‘각별한 인연’

 

<앵커 멘트>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의 국장에 직접 참석한 것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리 전 총리와 이어온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를 이은 각별한 인연을 송창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지난 1979년 10월 19일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리콴유 총리의 정상회담때 박근혜 대통령은 영부인 역할을 했고 만찬에서는 영어통역까지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정상회담 일주일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리콴유 총리가 너무나 애통해 하는 조문을 보냈다"며 "부모와 같은 정을 주신 분들"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06년 리 전총리를 다시 만났고 취임후에는 아들인 리센룽 현 총리와 정상회담도 가졌습니다.

<녹취> 박근혜 대통령(리센룽 총리와 회담/2013년 12월) : "리콴유 전 총리 내외분께서 저에게 늘 따뜻한 우의를 보내주셨는데 리센룽 총리님과의 만남은 항상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박 대통령은 생전의 리콴유 전 총리를 보면서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저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는 말로 각별한 인연을 강조해왔습니다.

KBS 뉴스 송창언입니다.  

 

(2015-03-30 KBS뉴스 송창언기자)

 

 

포브스 "리콴유, 박정희 대통령 경제정책에 감탄"

[미디어펜=문상진 기자]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는 29일(현지시간)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가 생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감탄했다고 전했다.

포브스는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소개한 뒤 리콴유 전 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닮은 점을 꼽으면서 이같이 소개했다.

이 매체는 두 지도자의 공통점은 경제적 성공 모범 사례를 만들어 역사에 자리매김한 것으로 평가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일본의 지배와 영국의 철수, 싱가포르를 지배했던 말레이시아 지도자들과 맞서는 한편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힘들었던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수준의 기본시설을 갖춘 경제·금융 중심지로 키워나갔다고 평했다.

 

   

▲ 미국의 경제지인 포브스는 29일(현지시간)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꼴 지도자로 소개했다. 사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난 1979년 10월19일 청와대를 방문한 리콴유 전 총리를 접견하고 있는 모습./사진=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벌을 감독·지도해 이들이 자동차, 조선, 전자기기 등을 만들어 미국, 영국,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하게 했다며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 현대, LG, SK 등은 박 전 대통령의 추진력과 안목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포브스는 리콴유 전 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6차례 방문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박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감탄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2시(현지시간)부터 싱가포르국립대 문화센터에서 열린 리콴유 전 총리의 국장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장례식장에 도착한 뒤 조문록에 서명하고 "리 전 총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였다(Lee Kuan Yew was a monumental leader of our time)"며 "그의 이름은 세계 역사에 새겨져 영원히 기억될 것(His name will remain forever engraved in the pages of world history)"이라고 글을 남겼다.

박 대통령은 이미 자신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리 전 수상 부부는 나에게 부모님 같은 정을 주시는 분들"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 대통령과 리 전 총리의 인연은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9일 리 전 총리의 국빈방한 당시 만남을 가졌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기 1주일 전으로 당시 리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박 대통령은 작고한 모친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통역도 맡았다.

리 전 총리도 회고록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박 전 대통령)의 20대 딸 박근혜의 통역으로 우리의 대화는 진행됐다"고 이 만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이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시절이던 2006년 5월 20일 고려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리 전 총리 내외와 재회했다.

당시 리 전 총리의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선거유세를 다니려면 목이 제일 중요하다. 목을 잘 보호해야 한다"며 싱가포르산 사탕을 건넸고 박 대통령은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이렇게 나를 챙기셨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자서전에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 7월 15일에는 당시 고문장관이던 리 전 총리의 초청을 받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의원 자격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환담을 나눴다. 박 대통령은 당시 콰 여사가 2006년 방한 때 줬던 사탕을 떠올리면서 "마침 당일 피습을 받아 먹을 수 없었다"며 "대신 잘 간직했다"고 말했다.

이 '커터칼 피습'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나중에 두 분(리 전 총리 부부)이 내 소식을 듣고 너무나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들었으며 두 분은 나의 쾌유를 비는 편지도 보내주셨다"면서 "부모님의 정을 느끼게 해준 두 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자서전에 밝혔다.

 

(2015-03-30 미디어펜 문상진 기자)

 

 

   [리콴유 타계] 빗자루 든 36세 총리…

       가난한 漁村을 强小國으로 키워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91) 전 총리가 23일 오전 3시 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AP 뉴시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91) 전 총리가 23일 오전 3시 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AP 뉴시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정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자 세계적인 물류·금융·비즈니스 중심지다.

빛처럼 영리했던 젊은 시절

리콴유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혁명가 쑨원·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등과 같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북부에서 남부·동남아로 이주한 한족) 출신이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가 깃든 이름을 얻은 소년은 명문 래플스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저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

 

이후 리콴유의 삶은 대학 시절 요동친다. 대공황 여파로 집안이 몰락하는 걸 지켜봤고, 학교에선 다른 인종 출신들과 물과 기름처럼 지내며 사회 부조리에 고민했다. 훗날 인생의 동반자로 해로한 두 살 연상의 아내 콰걱추(1920~2010)와 만난 곳도 래플스대였다.

식민지 시대에 배운 실용주의

1941년 12월 들이닥친 일본군에 동족 수천명이 살상당하자 리콴유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통치 이념이자 신념인 '실용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한다.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해 연합군의 모스부호 해독 임무를 맡아 연일 들어오는 추축국 패전 소식에 새 세상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혼란이 가시지 않자 심란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리콴유 연대기 표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에서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고,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의 창립을 이끌며 사무총장에 올랐다. 5년 뒤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서른여섯 살 리콴유는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식민지 언어를 공용어로

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1963년 말레이연방 가입을 결정했으나 공업화 추구 노선이 말레이연방의 다른 구성원들과 충돌하며 2년 만에 쫓겨나듯 탈퇴했다.

리콴유가 당장 풀 문제는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 갈등이었다. 이를 풀 실마리는 '강력한 공용어'라고 보고, 그는 어느 민족의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언어' 영어에 '제1 공용어' 지위를 부여한다.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의 반발에도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하지만 '유교적 권위주의'만큼은 국가 운영 이념으로 극대화시켰다. 혹독한 법치와 반부패 제도를 확립해 거리에서 껌만 뱉어도 심하면 태형(笞刑)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마약은 0.5g 이상 가져도 사형당할 수 있는 나라로 바꿨다. 부패행위조사국(CPIB)으로 공직자를 밀착 감시했고, 1995년 가족이 사들인 주택 가격이 올라 논란이 일자 자신도 조사를 받았다.


	싱가포르 개관 표

리콴유는 강경 반공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온건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좌파와 연정을 꾸렸으며, 급진 공산주의에 맞서며 국익을 좇았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 독재 비판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을지,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에 대해 나는 늘 후자(後者), 마키아벨리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언론 자유보다 우선한 것은 국가 단합"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당이 정부이고 정부는 싱가포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 등의 생전 발언은 국가 중심 노선에 대한 그의 확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1988년 내정간섭을 문제삼아 미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비판을 용납 않는 통치 방식 때문에 '정치 후진국'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정치는 권위주의, 경제엔 자유

하지만 리콴유는 산업 분야에선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해상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극대화시켜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업자 민원 처리 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17%)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이런 개방적인 경제정책 덕에 1만여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200여곳이 둥지를 틀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 안주"라며 국민을 독려해온 그는 31년 통치를 마감하고 1990년 퇴임한 뒤에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정부 운영은 오케스트라 지휘와 같다. 유능한 팀 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악기'가 되어준 각료와 국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63년을 함께 산 반려자 콰걱추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혼수상태의 부인 옆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해온 만큼 사별의 충격은 컸고, 5년 뒤 천상에서 재회하게 됐다.

(2015-03-24 TV조선 곽수근 기자/정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