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명작시·애호시 모음

맑은 영혼의 시인 이해인

Smart Lee 2007. 12. 11. 13:37

 

 

  

가난한 새의 기도             

                        이 해인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도 기쁨이 넘쳐날

서원의 삶에

햇살로 넘쳐오는 축복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가을편지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사 랑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진다는 것을.
 
 
부를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는
칭찬과 격려 따스한 웃음
다른 이의 약점을 감싸주는 사랑과 인내
이웃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관용
힘없고 아픈 이들에 대한 참된 배려와 정성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말을 위한 기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향기로운 말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보고 싶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을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봄과 같은 사람

봄과 같은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게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우선 그 안에 해야할 바를 최선의 성실로 수행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새롭히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한 송이 수련으로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못 속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 위에 풀어 놓고

그래도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밤마다

별을 안고 합장하는

물빛의 염원


단 하나의 영롱한 기도를

어둠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나를 위해

순간마다 연못을 펼치는 당신


그 푸른 물 위에

말없이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수선화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샐물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한 그루의 우정 나무를 위해

 

우리가 한 그루 우정의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선

한결같은 마음의 성실성과 참을성, 사랑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나친 고집과 독선, 교만과 이기심은 좋은 벗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정성스럽고 진지한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한다.


나와는 다른 친구의 생각을 불평하기보다는 배워야 할 점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늘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지니자.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늘 흔연히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으로 달려가자.


가을 열매처럼 잘 익은 마음, 자신을 이겨내는 겸허함과 기도의 마음으로 우정의 나무를 가꾸자.


우리가 한그루 우정의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마음의 성실성과 참을성,
사랑의 노력이 필요하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아직도 화해가 안되고, 용서가 힘든 친구가
있다면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전에는 가까웠다가 어느새 멀어지고 서먹해진 친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미루지 말고 어떤사랑의 표현을 하라. 가을 열매처럼 잘 익은 마음. 자신을
이겨내는 겸허함과 기도의 마음으로......

이해인(1945~)


강원도 양구 출생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는 1964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75년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과 졸업, 1985년 서강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70년 "소년"지에 "하늘"과 "아침"을 발표하여 등단.

 

그의 시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으로 인정 받기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시에는 깊은 종교적인 신앙과 영감이 깔려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게 함축되어 있다. 작품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겪는 고독과 슬픔, 영혼의 병에서 오는 깊고 심한 갈등을 진솔하게 나누고자 하는데 있다. 그의 시는 마치 영원한 구원자에게 바치는 한 떨기의 꽃, 눈물의 제단에서 피어 오르는 향불처럼 이 세상의 고뇌와 법열의 진정한 고백이다. 시인의 겸손하고 자신을 바치는 진지한 자세가 느껴진다. 1인칭과 2인칭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고통을 시인과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고 있다. 

 

이해인 시인(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은 2007년도 '천상병 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시사랑문인협회가 '귀천'의 시인 고 천상병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이 상은 올해로 다섯번째 수상자를 선정, 시상하게 됐다. 수상작은 이해인 시인의 시집 '작은 위로'이다. 심사위원회(위원장 강희근·경상대 교수)는 심사평에서 "이해인 시인의 시편들은 한국시에서 볼 수 없었던 영혼의 시학을 보여준다. 사물과 일상이 맑은 영혼을 만나 이루어지는 결 고운 정서는 세상살이에 찌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의 창을 열어 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집 : 민들레 영토 (1976),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979), 시간의 얼굴 (1989), 사계절의 기도 (2000), 다시 바다에서 (1998),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1999),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1999) 제9회 새싹문학상 (1981), 여성동아 대상 (1985), 부산여성문학상 (1998) 수상, 천상병 시문학상(2007) 수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