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영성 교육을위한 소중한 말씀들

하나님의 형상

Smart Lee 2013. 8. 1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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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형상(1)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던 때에 개는 개처럼 지으시고 소는 소처럼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실 때는 다르다. 사람을 사람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지으셨다. 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고 라틴어로는 IMAGO DEI라 쓰고 영어로는 IMAGE of GOD이라 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지니고 있을 대에는 하나님에 가까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에서 멀어질 때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육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음의 8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영이신 하나님이다.

 둘째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넷째는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다섯째는 고대사회에서는 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식하였다.

 여섯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직무를 부여하셨다.  

여덟 번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사랑의 교제를 나눌 파트너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2)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바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일러 준다. 이 말씀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엿새 동안에 펼쳐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창세기 1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계속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의 중심에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신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창조적인 능력이 부여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주어진다. 우리 나라같이 자원은 부족한데 인구는 많은 나라에서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국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좁은 땅에 부존자원이 없기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조적인 능력을 갖추게 될 때에 국운이 열린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말한다.

 

"자네들 남보다 앞서고 성공하려면 하나님을 잘 믿어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자네들도 창조적인 사람들이 되어 남들보다 앞 서게 된다. 그래서 성공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착실히 믿는 사람들은 술을 금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거기에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된다. 거기에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누리니 자신도 창조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선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3)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의 두 번째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성경이 거듭거듭 일러주는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랑의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과 가깝고 미워할 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얼마나 신앙적이고, 영적이냐?’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세 가지 단어가 쓰인다.

첫째는 AGAPE이다. 둘째는 PHILO이다. 셋째는 EROS이다.

 

AGAPE는 조건 없이 베푸는 무제한적인 사랑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이다. 땅 위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 이에 가깝다. 가장 성숙되고 승화된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다.

 

PHILO는 조건부로 베푸는 사랑이다. 바로 GIVE and TAKE,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는 사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간에 주고 받는 사랑이 이 단계에 속한다.

 

EROS는 육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이다.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에로스로서의 사랑에 몰입하기에 여기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EROS로써의 사랑을 벗어나 PHILO의 사랑에 머물지를 말고 AGAPE의 사랑의 경지에까지 승화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형상(4)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지으시던 때에 개는 개처럼 지으시고, 소는 소처럼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지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 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8가지로 언급하였다. 8가지 중에서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에 관하여는 앞의 글에서 이미 설명한 바이다. 오늘 글에서는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자.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지만 삼위(三位)로 계신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이다. 이를 "하나님의 공동체적 존재방식"이라 일컫는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 역시 ‘공동체적 신앙’이어야 함을 말해주신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만 산속이나 골방에 깊이 들어 앉아 수행을 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런 삶은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 둘을 일러주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이르셨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 셋은 분리될 수 없다. 그 자체가 공동체로 엮어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5)

 

고대사회에서는 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식하였다. 왕은 하나님의 형상을 띠고 지상에 임하여 있는 분이라 인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왕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모든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인 왕의 존엄성을 띠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얼마만큼 존엄하냐? 왕의 신분만큼 존엄하다.

 

신약성경 베드로 전서 2장에 이르기를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하였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이요 제사장이다. 그래서 존엄하고 존귀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도 있지만, 모든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의 존엄성을 지녔고 제사장의 고귀함을 지녔다. 그래서 다른 무엇과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참된 평등사상은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창조되던 때부터 왕의 존엄성을 지니고 창조되었기에 존엄하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깨우친 것은 성경이요 기독교였다. 하나님 앞에서 왕도, 하인도,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왕처럼 존귀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 가르침의 시작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형상(6)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지으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관리할 청지기로 지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그 복을 누리고 살게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창세기 1장 27, 28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때부터 사람에게 허락한 복을 누리고 살게끔 하셨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때부터 ‘이미 주신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요,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고 사는 "복 누리기"가 근본이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이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생활이 궁색하고 행복스럽지 못하다. 크리스천으로써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나날의 삶은 자신도 미쳐 모르는 사이에 창조섭리에서 벗어난 삶이 된다.

 

"받은 복 누리기"가 영적인 삶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바탕이 된다.

 

(2012-01-16/21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