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5주년을 보냈다. 5년이 지나면 100주년이 된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까지 꼭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즘 들어 다행스러운 것은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번져 나가고 있는 점이다. 매스컴의 보도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서민들의 대화 속에서도 통일의 기운이 훨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께서 “통일은 대박이다”는 명언을 말한 후로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민족중흥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한 가지 더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의 입장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무조건 북한 편을 드는 것이 중국입장이었는데 요즘 들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견해가 중국의 식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일본 동경대학의 한 경제학자의 말로는 통일한국이 되어지고 남한의 경영,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이 합하여지면 중국을 넘어서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어 통일한국이 세계일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란 전망을 하였다.
문제는 통일한국이 어떤 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그 정신적 기초를 3·1운동정신에서 찾는다. 3·1운동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통일한국이 이루어지게 되면 세계사에 당당한 선진일류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3·1운동 정신은 독립선언문에 분명하게 담겨져 있다. 이를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자유, 자주정신이다. 둘째가 평화정신이다. 셋째가 저항정신이다. 넷째가 공동체 정신이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는 말로 시작되는 독립선언문 속에는 인류 공동체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95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이런 고상한 정신을 품고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아침묵상 제목과 날짜
3·1운동 정신으로 통일운동을..(2) |
|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운동이었다. 우선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리고 만세운동이 일어난 전국 지도를 보면 75%정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 글에서 지적한 3·1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문 속에 담겨져 있다. 그 중에 첫째가 자유, 자주정신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이 누리는 정신의 핵심이 된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크리스천들이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모시고 산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르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진리의 사람은 언제나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신도들의 많은 수가 진리 비슷한 것을 진리로 착각한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500년 전 종교개혁 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말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고, ‘나의 복음이다’라고 거듭 강조하곤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이미 받은 자유이다. 이미 받은 자유를 누릴지언정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3·1만세운동은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쇠사슬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독립선언문에 적힌 자유에는 그런 민족적, 정치적 자유만이 아닌 영의 자유, 정신의 자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통일한국시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아침묵상 제목과 날짜
3·1운동 정신으로 통일운동을..(3) |
|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겉보기로는 실패로 끝난 운동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크게 성공한 운동이었다. 먼저 그 해 그 운동이 없었던 채로 1945년 독립을 맞았더라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억압에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굴종으로 끝났더라면, 우리의 현대사는 수치스런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이 힘을 모아 일본제국주의 군대와 경찰에게 맨 주먹으로 저항한 3·1운동이 있었기에 우리 겨레는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의 파장은 비단 조선반도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약소국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중국인들이 도전을 받고 자극을 받아, 3·1운동이 일어난 두 달 후에 5·4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에서의 5·4운동은 중국의 현대사를 바꾸어지게 하는 분수령이 된 운동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독립을 위한 민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3·1운동에 도전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3·1운동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글이 독립선언문이다. 독립선언문에 담긴 위대한 정신이 평화정신이다. 그리고 높은 도덕성이다. 독립선언문에는 일본인들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돌을 던지거나 해를 가하지 말고, 순수하게 평화운동으로 우리의 주장을 표시하자는 부분이 있다. 글자 그대로 비폭력, 무저항 평화정신이다.
3·1만세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을 주창한 몇 달 후에 인도의 간디가 영국을 상대로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기에 3·1운동은 비폭력운동의 원조 격에 해당된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정도 전에 당시의 기독교인이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에 이를 알게 된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기독교만으로 그런 민족대사를 도모하지 말고 범국민적으로, 범종교적으로 민족의 역량을 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권하여 합의에 이르렀다.
그래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개신교계의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당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의 지도를 살펴보면 75%정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선배들은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 예수사랑과 동포사랑을 한 신앙, 한 가슴, 한 비전으로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03-03/06 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