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못 믿는 ‘선불제 사회’
중국에 살다 보면 신주단지처럼 잘 간수해야 하는 ‘카드’가 석 장 있다. 비자카드, 마스터카드 같은 신용카드나 은행 현금카드 같은 부류의 카드 얘기가 아니다. 중국에서도 이런 카드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살아가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카드들이 있다.
집에서 쓰는 전기(電氣)를 충전해 쓰는 ‘전기카드’, 밥 해먹을 때 쓰는 가스를 충전해 쓰는 ‘가스카드’, 그리고 빨래하고 몸을 씻을 때 쓰는 생활용수를 충전해 쓰는 ‘물 카드’. 중국의 각 가정에선 불시에 전기며 물, 가스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돈을 지불하고 카드에 채워놓는 게 가장 기본적인 생활수칙 중 하나다. 수시로 전기가 얼마 남았는지, 물은 또 얼마 남았는지 체크해야 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무슨 이런 엉터리 같은 제도가 있느냐고 버틴다면 자기만 손해다. 컴퓨터로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끊겨 자료가 다 날아간다거나, 아침 출근을 앞두고 머리엔 새 집을 지었는데 수도꼭지에서 ‘윙~’ 하는 소리만 들리는 난처한 경우를 당했어도 어디 항의할 곳 하나 없을 테니까. 그뿐인가. 휴대폰도 요금 카드를 구입, 미리미리 충전(充錢)해 놓지 않으면 돈이 떨어져 ‘사용 정지’되기 일쑤다. 후불이 원칙인 시내전화나 인터넷 사용료도 미리미리 얼마간의 돈을 예치해 두어야 안심이 된다. 요금 내는 기한을 며칠만 넘기면 수화기에서 “뚜뚜뚜뚜~”라는 통화 불능음이 나온다. 또 처음 중국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좀체 받아들이기 힘든 중국인들만의 생활방식 중 하나가 ‘야진(押金·보증금)’ 주고받기 문화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거의 모든 것에 야진이 붙는다고 보면 된다.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겠지만,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숙박을 해도 체크인을 할 때 숙박비의 두 배쯤 되는 야진을 걸어야 한다.
물론 체크아웃할 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돌려받기는 한다. 셋집을 계약할 때 임차료 2배의 야진이 붙고, 국제전화 로밍을 하려면 먼저 3000위안의 야진을 걸어야 한다. 휴대폰 요금을 후불제로 바꾸려면 3000~4000위안의 야진이 필요하고, 생수를 배달해 먹으려면 물통에 대한 야진으로 개당 50~100위안을 내야 한다. 응급차에 실려간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이송용 침대를 쓰려는데 “야진 먼저 내야 침대를 내줄 수 있다”고 했다는 고약한 경우도 있고, 양꼬치를 팔면서 고기를 꿴 쇠꼬챙이에 대한 야진을 받는 식당도 있다고 한다.
더 황당한 것은 외국인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것들이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중국인 지인(知人)에게 이런 방식이“너무 귀찮고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면, “전기며 물 같은 것은 미리미리 사두면 훨씬 편리하고, 야진은 나중에 돌려받는 것인데 뭐가 불편하냐”고 하므로 오히려 머쓱해진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으로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국가 대접을 받게 됐다고 주장하지만, 전기카드며 야진 같은 ‘선불(先拂) 문화’는 아직 덩치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너무나도 빈약한 중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중국인들과의 합작사업에 성공하려면 공식적인 계약 관계 이전에 합작 파트너와 오랜 기간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 마시고, 목욕도 함께 하고 인간적으로 흉금을 터놓을 정도로 공을 들이는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만 한다는 건 중국에 진출한 많은 한국 기업인들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혹자는 ‘남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이런 중국인의 습성이 ‘문화혁명 10년 암흑기’를 거치며 더 심해졌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요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점점 늘어나는 등 신용 거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젊은 세대라면 신용카드 한 장쯤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선불제 같은 '신용사회의 적들’은 이런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지겠지만, 중국인들의 의식까지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듯싶다.
베이징=이명진 조선일보 특파원 mjlee@chosun.com
조선매거진[1951호] 200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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